점술가 멘토가 되다
비밀보장에 객관적 판단...연애사·진로 선택·성형여부 등
힐링이거나 도피이거나
속 얘기 하는 고객이 절반 이상...부담스런 정신과 상담 대신 각광
占의 사회학
"꽉 막힌 어른들과 상담하느니..." 세대 간 대화 단절 서글픈 현실
역술인이 말하는 占
점괘는 참고만...전부가 아니다
강소라(25ㆍ가명)씨에게는 얼마 전부터 '인생의 멘토'가 한 명 생겼다. 심각한 진로 선택부터 사소한 연애사까지 멘토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곤 한다. 단점이 있다면 돈을 내야 하는 것. 그래도 그는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원인 분석과 해결 방안까지 모든 것이 명쾌하다. 게다가 비밀보장까지 확실하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배보다도 더 찾게 되는 이 사람은 바로 점술가다. 강씨는 스스로를 ‘점괘 중독자’라고 말했다.
시작은 1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친구를 따라 우연히 타로 점집에 갔다. 그 때만해도 미신을 믿는 친구가 한심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잘 맞았다. 호기심이 생겨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저는 남자친구가 언제 생길까요?”
“당분간 안 생겨”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데 정말로 수개월이 지나도록 안 생겼다. 오기가 생겨 다시 그 곳을 찾았다. 애인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마음이 움직였다. 강씨는 그 후 7개월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점집을 찾아갔고, 정말로 남자친구가 생겼다.
다음은 취업. 번번히 시험에 낙방하자 다시 점집을 갔다.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이번에는 단가를 높였다. 타로를 넘어 사주와 관상까지 보러 다녔다. 가격부담이 커져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강씨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했다. 강씨는 “이상하게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강씨처럼 점집을 찾는 2030들이 크게 늘고 있다.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값비싼 돈을 내야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점집들도 이제 '양지'로 나왔다. 오히려 젊은 층의 '힐링'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 추세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번화가에서 타로로 사주를 점치는 한 역술가는 “예전에는 고민이나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요즘은 마음 속 얘기를 털어놓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라며 “미래가 불확실한 청년 세대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많이 오가는 서울 신촌의 한 사주카페에서 만난 직장인 박지은(35)씨는 “어디 가서 뭐라도 얘기하고 싶은데 상담문화가 정착돼 있지 않아 마땅히 해소할 곳을 찾기 힘들다”며 “그렇게 겉을 맴돌다 찾은 도피처가 점집”이라고 말했다. 박씨 또한 주로 다른 데서 말하기 힘든 내용을 털어놓기 위해 한 달에 적어도 두 세 번은 점집에 들른다. 마땅히 하소연할 곳이 없는 박씨에게 점집이 ‘대나무 숲’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그는 "사주에 따라 내 개인 성향이 나오는데 그것에 맞춰 점쟁이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다"며 "그게 정답이든 아니든 내 얘기를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성격에 맞춰 이야기해 주니 듣고 나면 속이 좀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생 정남현(24ㆍ가명)씨도 가족문제나 진로에 대해 상담할 일이 생기면 타로집을 찾는다. 학교나 정신과 등에서 상담을 받으면 자칫 기록에 남을 수도 있는 데다가 자신이 이런 상담을 받았다는 걸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정씨는 "사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부모님의 이혼이나 가족들 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기 껄끄럽다"며 "점집은 제3자에게 내 깊은 얘기를 터놓고 그것에 대한 세세한 상담과 조언을 들을 수 있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또 "남들에게는 쉽게 밝히기 어려운 내면의 어두움을 이렇게라도 들춰내고 나면 한결 기분이 가뿐해진다"며 "비용이 비싸 자주는 못 가더라도 한 두 달에 한 번이나 석 달에 한 번쯤은 꼭 간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사회 전반에 만연한 소통 부족을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답답하고 화가 나는 일이 생긴다고 매번 친구에게 토로할 수도 없고, 교수님이나 선배 등에게 얘기해봐야 ‘그 땐 다 그런 거야’,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다’라는 어설픈 위로만 돌아올 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힘들다고 섣부르게 회사 선배나 동료에게 어려움을 얘기했다가는 '회사에 적응을 못한다'고 소문나 도리어 더 힘들어지기 마련. 해소되지 못한 스트레스는 시간이 갈수록 켜켜이 쌓이고 털어놓을 데는 마땅찮고 상담하자고 정신과에 갈 엄두는 미처 못 내는 게 현실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점괘의 유행은 세대 간의 대화 단절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어른들 중에는 자기의 젊은 시절을 떠올려 요즘 젊은 세대들도 '이럴 것이다'라고 보는데 사실 현실은 기성세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며 "그런 맥락에서 세대 차를 느낀 청년들은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와 상담하느니 차라리 점집이 이해를 구하기도 쉽고 편안하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도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경쟁상대이거나 거리를 두고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마음을 터놓기는 힘든 게 현실"이라며 "반면 점집은 소통할 곳이 마땅찮은 청년들에게 비밀보장도 되고 객관적 입장에서 자신들을 판단해줘 믿고 얘기할 수 있는 숨겨진 소통창구인 셈"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경향에 대해 우려 섞인 시각도 적지 않다. 점집에서 평소에는 하기 힘든 얘기를 털어놓고 상담을 하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지나쳐 점괘에 일희일비하며 과하게 의존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대학생 김윤지(26ㆍ가명)씨는 지난해 쌍커풀 수술을 받았다. 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중 성형을 하면 관상이 달라져 운명까지 바뀔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관상을 보러 갔는데, 마침 그곳에서 "당장 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관상쟁이의 말은 이랬다. 얼굴에 칼이 들어올 상이니 먼저 칼을 대면 그걸 막을 수 있다는 것. 김씨는 "등골이 오싹했다"며 "그날로 바로 성형 상담을 받고 그 주에 수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대학가에서 관상을 보는 한 관상가는 "요즘은 관상성형이 대세"라며 "그냥 예쁘게만 고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고쳐야 운이 좋아 지고 면접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지 또 어디를 고쳐야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지 등을 물으러 온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역술가는 "요즘 20~30대 중에는 고3 수험생보다도 방향을 못 잡은 경우가 많다"며 "아예 '저한테 어울리는 직업이 뭔가요' '제가 로스쿨에 가도 될까요' '저 회사 옮겨도 되나요' 를 묻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땐 정말 황당하다"고 혀를 찼다. 그는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대개 기가 약하고 의존적인 성향을 가지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곳에 모든 걸 의존하려 하는 건 잘못됐다"며 "점괘는 '참고사항'일 뿐 그게 전부라고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고 충고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뭐든 이거 하나만 고치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며 "자꾸 점이나 운세에 의존하다 보면 자신이 노력해서 해쳐나가야 하는 것도 막연히 손금을 고치거나 얼굴을 바꾸는 것으로 대체하게 돼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허망함만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진주기자 pearlkim72@hk.co.kr
정새미인턴기자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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