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구로다 히로키(41)는 미일 통산 203승의 대투수다. 팬들에게 특히 더 사랑 받는 이유는 남다른 ‘의리’ 때문이다. 1997년 히로시마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해 11년 동안 활약하던 그는 2008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다가 뉴욕 양키스와의 계약이 끝난 2014년 돌연 히로시마로 복귀했다. 당시 그가 메이저리그 구단이 제시한 1,800만 달러(200억원)의 계약조건을 뿌리치고 히로시마가 내민 4억 엔(43억원)을 받아들인 일화는 전 세계 야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노장의 헌신 덕분에 히로시마는 올해 25년 만에 리그 우승이라는 감동까지 만들어냈다. 구로다는 오는 22일부터 시작되는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일본시리즈를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한다. ‘영원한 카프맨’ 구로다의 각오를 선수 인생과 지금까지의 인터뷰들을 종합해 팬들에게 전하는 편지 글로 재구성했다.
히로시마 팬들에게.
고교시절 저는 보잘것없는 투수였습니다. 힘도 부족했고, 제구력도 좋지 않았죠. 마운드에 제가 오를 때면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패전 처리 투수였으니까요.
한 번은 NHK 방송사에서 저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고 해 제작진과 함께 모교에 방문했는데, 당시 야구부장은 고교 때 제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섭섭한 마음은 안 들었습니다. 그럴 만했던 선수였거든요.
고교 졸업 후 프로무대 직행은 언감생심, 갈 수 있는 대학도 몇 개 없었습니다. 고향인 오사카를 떠나 도쿄에 있는 센슈 대학에 예비선수로 겨우 들어갔습니다. 이 학교는 우수한 선수들이 몰리는 도쿄 6대학리그보다 한 단계 낮은 도토 대학리그에 속한 학교였죠.
이 곳에서 히로시마 도요카프와도 인연을 맺었으니, 돌아보면 운명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곳은 유명 대학들보다 주전경쟁이 심하지 않아 꾸준히 기회가 주어졌지만 리그 수준이 낮다 보니 프로구단 스카우트의 눈에 띄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히로시마의 스카우트만큼은 틈틈이 우리 팀을 찾아 저의 발전을 지켜보며 격려해 줬죠. 그 때부터 전 히로시마 입단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 힘을 기르고 경기력을 쌓아 4학년 때는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때 직구 구속도 150km에 달해 그제서야 프로팀 입단이 꿈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96년 신인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결국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지명을 받아 붉은 모자를 썼습니다. 다른 구단은 마음에도 없었으니, 제겐 너무나 큰 기쁨이었죠. 데뷔 시즌이었던 1997년부터 지금까지 히로시마 팬들에게 한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은 제가 가치 있는 투수로 성장하는 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자양분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앞둔 2006년의 일은 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당시 주변에 “프로선수로서 시장에서의 내 가치를 알아보고 싶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고 다녔습니다. FA 이적 가능성을 열어 놓은 셈이죠.
하지만 그 해 10월, 시즌 마지막 등판 때 관중석에 펼쳐진 대형 걸개에 적힌 이 메시지를 보고는 아무리 프로라지만 돈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걸 가슴 속 깊이 새겼습니다.
“우리는 함께 싸워왔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미래에 빛나는 그 날까지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대의 눈물이 되어주리.”
저는 아무리 큰 돈이 따라와도 일본 내 다른 팀으로 옮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말한 것처럼 제가 타 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히로시마 홈 구장에서 카프 팬, 카프 선수를 상대로 공을 던지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2007년 12월, 히로시마 팬들의 응원과 격려 속에 분신과도 같던 붉은 모자를 내려놓고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의 푸른 모자를 썼습니다. 그 때 저는 스스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미국 무대에서 성공한 뒤 던질 힘이 남아있을 때 반드시 히로시마로 돌아오겠다고요.
33세 때 LA 다저스에 입단해 4시즌을, 이후 뉴욕 양키스로 옮겨 3시즌을 치렀더니 어느덧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때가 됐더군요. 약속을 지킬 때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FA 신분이 된 2014년, 히로시마로 돌아와 빨간 모자를 다시 집어 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히로시마와 계약한 연봉은 4억 엔으로, 당시 메이저리그 구단이 제시한 1,800만 달러와 비교하면 매우 적은 돈입니다. 그러나 시민구단 히로시마의 총 예산을 생각하면 4억 엔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히로시마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싶다는 열망은 어떤 돈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히로시마 팬들은 한결같았습니다. 지난해 저의 복귀전 때 “우리들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개로 저를 맞아주셨고, 제가 등판하는 날이면 모두 일어서 응원해 주셨죠. 그런 팬들을 보며 전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올해 히로시마가 일군 25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은 이처럼 모든 팬과, 모든 선수들의 마음이 한 데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일본시리즈를 끝으로 현역 생활을 정리하려 합니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떠날 때라는 결론이 섰습니다. 항상 완투를 바라보며 마운드에 올랐던 제가 9이닝을 던질 수 없는 몸이 됐다는 점에 저는 보이지 않는 좌절감을 느껴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앞엔 22일부터 시작되는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일본시리즈가 남아있습니다. 상대 팀엔 투타 능력을 겸비한 ‘괴물’오타니 쇼헤이(22)가 버티고 있어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 되겠지만, 저는 온 힘을 쏟아 부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제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일본시리즈에서 팬들과 함께 웃고 싶습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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