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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을 바꾸면… 그 발칙한 상상들

입력
2016.03.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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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자용 신호등의 불빛이 이상하다. 정지는 파랑, 통행은 빨간색으로 바뀌어져 있다. 사실은 컴퓨터를 이용해 신호등 불빛의 색깔을 조작한 이미지다.
보행자용 신호등의 불빛이 이상하다. 정지는 파랑, 통행은 빨간색으로 바뀌어져 있다. 사실은 컴퓨터를 이용해 신호등 불빛의 색깔을 조작한 이미지다.

인간은 색을 발견하고 만들어 내면서 그 의미와 느낌까지 규정한다. 오랜 시간에 걸친 학습과 경험을 통해 굳어진 색의 성격은 때론 인간의 관념을 지배하기도 한다. 색에 대한 이러한 고정관념은 분야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약속이나 믿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미덕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색에 대한 콘크리트 같은 신념을 허무는 일은 의외로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때마침 만우절이 가까이 왔으니 주변에서 흔한 색깔들을 감쪽같이 바꿔 보기로 했다. 비록 상상에 불과하지만 색깔이, 또한 그 의미가 뒤바뀐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 발칙한 상상①… 신호등의 빨강ㆍ파랑을 바꾸면

(2030년 4월 2일자 00일보)

만우절인 1일 아침 평소처럼 출근길에 나선 이네돌(가명)씨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정지 신호 때는 파란 불이 켜지더니 ‘걷는 사람’ 모양의 보행 신호로 바뀌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것 아닌가. 주변의 차량용 신호등 역시 빨강과 파랑이 바뀐 채로 작동하고 있었다. 빨간 불이면 출발하고 파란 불에는 멈추라니, 일순간 혼란에 빠진 거리에선 크고 작은 사고가 속출했다. 인근 지하철역도 전동차 사고에 이은 화재와 정전 때문에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자욱한 연기와 암흑 속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시민들, 그러나 웬일인지 녹색 비상구 유도등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극적으로 탈출한 한 시민은 다급했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도움의 손길은 나타나지 않았고 정체 모를 핑크색 불빛만 멀리서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원래 녹색인 비상구 유도등 색깔을 핑크색으로 바꿨다.
원래 녹색인 비상구 유도등 색깔을 핑크색으로 바꿨다.
원래 녹색인 비상구 유도등 색깔을 보라색으로 바꿨다.
원래 녹색인 비상구 유도등 색깔을 보라색으로 바꿨다.

(2030년 4월 3일자 00일보)

이번 대형 참사의 범인은 알파고에서 진화한 인공지능 ‘베타고(BetaGo)’로 밝혀졌다. 만우절을 맞아 장난기가 발동한 나머지 신호등의 빨강과 파랑을 모조리 바꿔놓은 것이다. 신호등뿐 아니라 비상구 표시도 핑크색으로 바꿨다. 단지 색깔만 살짝 바꿨을 뿐인데 인간의 교통 시스템은 마비되고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비상구 표시도 핑크ㆍ보라로 바꾸자

탈출하려는 시민들 일순간 대혼란

물론,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니 당황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했다. 1960년대 중국에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던 홍위병은 빨간색을 통행, 파란색은 정지로 규정한 교통체계를 만들었다. 혁명과업의 전진 또는 투쟁을 상징하는 빨간색을 정지신호에 쓸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혼란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원래의 교통체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홍위병 역시 색깔만 바꿨을 뿐이었다.

신호등이나 비상구 표시 색은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약속이자 규범과도 같다. 지구촌 어느 나라든 파랑은 통행을, 빨강은 정지를 지시한다. 20세기 초만 해도 철도 신호등에서 통행을 뜻하는 색은 흰색이었다. 정지를 뜻하는 빨간색 필터가 깨지면서 사고가 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파란색 신호등 체계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비상구 유도등의 녹색 역시 세계 공통이다. 인간의 눈이 화재나 정전 같은 위급상황에서 녹색광을 가장 잘 볼 수 있고 심리적으로도 안정과 편안함을 전달하는 녹색불빛을 따라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신호등ㆍ비상구 색깔은 세계 공통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약속 깨면

막대한 대가 치러야 할 수도

상상 속에서나마 색깔을 바꿔보니 오랜 시간 동안 지켜 온 색에 대한 약속이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색깔의 의미를 한 순간에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몇 년 전 신호등 색깔은 그대로인데 모양만 다른 삼색 신호등 설치가 무산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화장실 표지판의 남녀를 상징하는 색깔을 서로 맞바꿨다.
화장실 표지판의 남녀를 상징하는 색깔을 서로 맞바꿨다.
주차장 진입금지 표지판은 원래 빨간색.
주차장 진입금지 표지판은 원래 빨간색.
교통정리용 시설물 역시 원래 빨간색이다.
교통정리용 시설물 역시 원래 빨간색이다.

# 발칙한 상상②… 각 정당의 상징색을 바꾸면

“광고모델이 다른 제품 홍보하는 느낌”

“당마다 색깔 자주 바꿔 의미 퇴색”

선거를 앞둔 요즘 거리마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넘친다. 새누리당은 빨강, 더불어민주당은 파랑, 국민의당은 녹색, 정의당은 노랑…. 4ㆍ13총선에 임하는 주요 정당의 상징색을 컴퓨터를 이용해 무작위로 바꿔보았다. 그리고 유권자 10여 명에게 그 느낌을 물었다.

먼저, 조작된 사진을 본 유권자 중엔 색깔이 바뀐 사실을 아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영업자 최모(43ㆍ남)씨는 “당명과 사람, 기호가 맞는지만 비교했지 색깔이 바뀐 건 전혀 몰랐다”라고 말했다. 최씨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은 사진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봤다. 정당 색과 인물이 바뀐 사진을 보며 직장인 조모(44ㆍ여)씨는 “김태희가 아모레 광고 하다가 엘지생활건강 광고하는 거 보는 기분”이라고 비유했다. “어떤 당들은 당내 결속도 잘 안 되면서 색깔만 맞춰 입은 것 같아 우습다”라는 조씨에게 정당 별 상징색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다. 그는 “당마다 색깔을 자주 바꿔 왔으니 이미 그 의미는 퇴색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색깔 조작을 2초 만에 알아봤다는 직장인 김모(37ㆍ여)씨는 “국회의원들이 똑같은 색깔의 점퍼를 입고 다니는 광경을 보면 ‘또 선거철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마치 학생들이 과잠 입고 운동회 하는 느낌”이라고 평했다.

정당 색을 강조한 점퍼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대학생 최모(24ㆍ여)씨는 “우리 동네에 어떤 후보가 나왔는지 몰라서 정당을 보고 뽑아야 하는데 TV에서 발언하는 정치인들의 옷 색깔을 보면 정당을 구분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저마다 조작 사진을 보는 시각은 다양했지만 ‘대체적으로 어울린다’라는 대답이 ‘어색하다’는 쪽보다 많았다.

총선 앞두고 시민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색깔 바뀐 것 알아봐

당의 상징색 점퍼를 입고 있는 주요 정당 대표의 이미지를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무작위로 바꿔 보았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새누리당 김무성,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당의 상징색 점퍼를 입고 있는 주요 정당 대표의 이미지를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무작위로 바꿔 보았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새누리당 김무성,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후보자에 대한 세세한 정보나 정책 보다 이미지와 느낌, 색깔이 표심을 지배하는 시대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상징색 점퍼는 넘쳐나지만 진정 색깔 있는 정치는 찾아보기 어렵다고들 말한다. 점퍼 색깔 대신 정당과 후보자의 정책과 비전에 투표하는 세상이라면 당 대표들이 입은 겉옷 색깔은 중요하지 않다. 어색함과 비난을 무릅쓰고 주요 정당 대표들의 점퍼색깔을 바꿔 본 이유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중앙선관위에 등록된 후보자나 정당 정보 어디에서도 당의 상징색은 찾아볼 수 없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당의 상징색 점퍼를 입고 있는 주요 정당 대표의 원래 이미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새누리당 김무성,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당의 상징색 점퍼를 입고 있는 주요 정당 대표의 원래 이미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새누리당 김무성,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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