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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 제안 떠올라 아직도 촬영장 가기 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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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 제안 떠올라 아직도 촬영장 가기 겁나요”

입력
2018.02.08 04:4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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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미투 운동’ 확산

“회식 중 남자 스태프들 사라져

원로 연출가와 둘 만 남겨…

울면서 도망쳐 나왔어요”

여성 영화인 설문조사에선

“원치 않는 성관계 요구받아” 11%

피해자들 용기있는 고발 이어져

“적극적인 폭로 기대 어렵지만

공론화로 해결 모색 계기될 것”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신동준 기자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신동준 기자

“과거에 문인들 술자리는 사람만 바뀔 뿐 늘 똑같았어요. 남성 원로가 가운데 앉고 양 옆으로는 젊은 여성 문인들이 앉아 술시중을 드는 거죠. 몸을 더듬는 건 예사예요. 문단 술자리의 ‘클리셰’라고 할까요. 한번은 일부러 ‘지정석’에 앉았다가 한소리를 들었어요. ‘당신 자리 아니니 비키라’고. 성폭력 문제가 불거진 후로는 아예 술자리가 없어졌죠.” (중견 여성 문인 A씨)

“꽤 오래 연기했지만 영화 촬영장에 갈 때는 아직도 겁나요. 영화에 데뷔할 때 역겨운 제안을 받은 기억이 떠올라서요. 신인 시절 출연 계약을 앞둔 영화의 제작자한테 ‘함께 일하기 위해 너를 알고 싶다’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단호하게 연락을 끊었지만, 어디다 말도 못하고 한참 속앓이를 했어요.”(배우 B씨)

“지방 공연 때였어요. 오랜만에 전체 회식을 했는데, 남자 스태프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더니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나중엔 원로 연출가와 저만 남았죠. 알고 보니 일부러 둘만 남겨둔 것이더라고요. 울면서 도망쳐 나왔어요.”(공연 스태프 C씨)

검찰 내 성폭력 실태를 폭로한 서지현 검사가 도화선이 돼 사회 각 분야로 성폭력 고발 운동이 번지고 있다. 2016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어느 분야보다 앞장서 성폭력 추방에 힘썼던 문화예술계에도 다시 ‘미투(MeTooㆍ나도 당했다) 운동’이 불붙고 있다. 영화 ‘연애담’으로 주목받은 이현주 감독이 동료감독 성폭행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이 피해자의 폭로로 알려졌고, 최영미 시인이 성추행을 일삼던 원로 문인을 풍자한 시가 재조명되면서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문화계는 ‘터질 게 터졌다’면서도 이번 일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긴장하고 있다. 문화계 여성 종사자들이 한국일보에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성폭력 피해 경험은 위의 사례 말고도 더 많다.

최 시인의 폭로로 발칵 뒤집힌 문단은 찬반으로 나뉜 설전에 몸살을 앓고 있다. 최 시인의 시를 실었던 ‘황해문화’ 편집주간인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지난해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SNS에 인용하며 “이른바 문단밥을 먹고 살아온 모든 남성 작가들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전부 ‘잠재적 용의자’이거나 최소한 ‘방조자’였다고 해야 할 것”이라며 “각종 미시권력 관계가 가로세로 얽혀 있는 현재 한국 문단의 기본 구조 속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은 언제든지 재발하게 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이승철 시인은 “(최 시인이) 한국 문단이 마치 성추행 집단으로 인식되도록 발언했다”면서 “다수의 선량한 문인들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반발했다. 이 와중에 한국시인협회 새 회장으로 뽑힌 감태준 시인이 2007년 제자 성추행 추문에 휘말렸던 전력이 다시 불거져 문단 분위기는 더 뒤숭숭하다.

지난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기덕 감독 사건과, 남자배우의 촬영 중 여자배우 성추행 논란을 겪은 영화계는 성폭력 문제에 적극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해당 사건 이후 여성영화인모임과 영화진흥위원회는 영화계 종사자 749명을 대상으로 영화계 성폭력 실태 조사를 벌였다. 유성엽 민주평화당 의원실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이번 조사에서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요구받은 경험은 11.5%로 나타났다. 외모 평판과 음담패설을 당한 경험이 35.1%로 가장 높았고, 술을 따르거나 옆에 앉도록 강요, 또는 원치 않는 술자리를 강요당한 경우는 29.7%였다. 영화계 성폭력 실태를 간접적이나마 체감하게 하는 수치다. 채윤희 여성영화인모임 대표는 “3월초에 연구 결과 최종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라며 “이후 국회 토론회 등을 거쳐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영화 현장은 직장이나 일터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라며 “그런 오해로 인해 성평등 교육과 성희롱 예방 교육 같은 기초적인 안전망도 없었던 게 진짜 문제이고 다른 문화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성희롱ㆍ성폭력 직접 피해 경험 (여성 답변자)

※영화인의 성평등 환경조성을 위한 실태조사 중간연구 결과

문단과 영화계에서 촉발된 미투 운동은 공연계와 방송계로도 번져 나갈 조짐이다. 최근 MBC 드라마 PD가 상습 성추행으로 대기발령 조치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고발을 기대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다. 가해자가 문단 권위자나 감독처럼 권력관계상 우위에 놓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피해 사실을 알릴 경우 평판에 불이익을 감수하거나 일을 그만둘 각오까지 해야 한다. 할리우드의 미투 운동만큼 영향력을 갖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미투 운동의 의미는 작지 않다.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서혜진 변호사는 “미투 운동은 상담받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피해자들이 수치심을 이겨내고 피해 사실을 알리도록 용기를 준다”며 “문제를 공론화하고 적극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미투 운동이 피해자에게 신상 공개를 강요하거나 강제하는 데 역이용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며 “철저히 익명성을 보장하되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내도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표향ㆍ최문선ㆍ이소라ㆍ양진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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