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북기조 발표 후 ‘직접대화’ 언급
“北 올바른 의제 논의 준비해야”
백악관, 선제적 태도 변화 요구
트럼프 독단적 행동 가능성 없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미국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상황이 적절(right)하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경제제재와 외교수단, 나아가 군사력을 통해 북한을 최대로 압박하면서 도발을 막겠다는 새 대북기조를 발표하자마자 이번에는 김정은과 직접 대화를 언급하는 돌발 발언을 해 귀추가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내가 그(김정은)와 만나는 것이 적절하다면, 나는 전적으로, 영광스럽게(honored) 그걸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대부분의 정치적 인물은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나는 적절한 환경 아래에서 그(김정은)와 만날 것이라고 당신들에게 말한다”라며 “지금 말한 것은 긴급뉴스(breaking news)”라고도 했다.
블룸버그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으로 한반도 긴장이 지속적으로 고조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발언이 나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다만 김정은이 2011년 아버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집권한 뒤 한번도 외국 지도자를 만난 적이 없으며, 북한을 떠나지도 않았다고 설명해 트럼프와 김정은의 직접 대화 실현 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았다.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의 도발적 행동이 즉각 중단되는 것을 봐야 한다”며 대화의 전제 조건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 “지금은 명백히 그런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았다”면서 “그들(북한)이 선의를 보여야 한다”고 말해 대화가 이뤄지려면 북한이 핵ㆍ미사일 도발을 중단하고 비핵화 의사를 확실히 보여줄 것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김정은의 통치술을 인정하는 듯한 언급을 한데 이어 만남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사상 초유의 북미 정상회담이 과연 실현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선 후보 시절 “(당선되면) 김정은을 초청해 햄버거를 먹으며 대화하겠다”고 이미 밝힌 바 있고,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지난달 27일 미 공영라디오 NPR과 인터뷰에서 북미 대화가능성을 언급했던 만큼 트럼프 대통령 발언은 북핵ㆍ미사일 폐기를 위한 ‘고도의 전략’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단순 돌출발언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워싱턴 외교가의 한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등 철권통치 독재자에게 이례적 호감을 보이고 있다”며 “북한이 세계 최고 인권탄압ㆍ폐쇄국가 낙인이 찍혔더라도 그런 이유로 김정은과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대북 압박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북미 대화를 권유하고 있는 점도 트럼프 대통령과 각료들의 대북 유화발언의 배경으로 거론된다. 2일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데 대해 “대화만이 정확한 선택”이라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겅 대변인은 이어 “북중 상호원조 조약은 평화유지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해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보유가 조약상 중국의 자동군사 개입 의무에 해당하지 않음을 내비쳤다. 북미 대화를 원하는 중국이 대화의 조건으로 제시된 북한의 도발 중지를 은연중에 압박한 것이다.
우려되는 것은 북미 대화국면이 무르익는 과정에서 자칫 한국 정부가 배제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정부가 대북정책 수행 과정에서 동맹의 뜻을 반드시 먼저 묻겠다고 했지만, 이처럼 미중이 모종의 교감을 통해 ‘대화의 문’을 개방한 정황이 보이는 만큼 실제 트럼프와 김정은이 마주하기까지 한국의 의사가 충분히 개입되지 않은 채 끌려 다닐 가능성이 작지 않다.
그러나 ‘한 마리 제비’가 봄을 알리지 못하는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잦은 돌출 발언과 북한 핵ㆍ미사일의 엄중한 위협을 감안하면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어떤 형태의 북미 대화 가능성도 쉽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 발언 직후 백악관이 나서 대화를 위한 북한의 선제적인 태도 변화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는 설령 김정은을 ‘협상 파트너’로 여길 수 있지만 북한이 ‘핵 포기’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독단적으로 북미 회담에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그의 외교ㆍ안보참모들이 북한의 비핵화 양보 없는 정상회담에 찬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와 관련, 틸러슨 장관은 “북한은 ‘올바른 의제'에 대해 우리와 논의할 준비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올바른 의제란 단순히 (핵 개발을) 몇 달, 몇 년 동안 멈췄다가 재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트럼프 대통령의 대화 언급에 미국 여론과 언론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보수계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의 한반도 전문가인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 발언은 그의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밝히면서 대북 압력을 강화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모색하고 있는 ‘매우 부적절한 시기’에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발언으로 대북정책에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꼬집은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한심할 정도로 시기상조의 발언이다”고 평가하는 외교가 여론을 전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 역량과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해 한 말”이라고 보도했다. 미 스탠퍼드대 동북아센터의 신기욱 소장은 “트럼프 대통령 돌출 발언에 전략적 의미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며 “한국은 오락가락하는 발언에 일희일비 않는 게 낫다”고 말했다.
워싱턴=조철환 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베이징=양정대 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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