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동, 美육상 영웅이 되다
美 최초 10대 올림픽 대표 선발, 베를린 대회 5000m 출전
일본군 전쟁포로가 되다
폭격기 추락해 47일간 표류, 구사일생 닿은 곳이 日점령지
綜戰까지 구타ㆍ살해협박 시달려
기독교 연사로 다시 태어나다
日 간수에 대한 복수심 접어, "증오는 스스로를 파괴, 용서야 말로 진정한 치유"
1943년 4월 21일, 하와이 오하우섬 서쪽 850마일 해상. 수색 구조작전에 투입된 미국 공군 루이스 잠페리니 중위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가 기관 고장으로 추락한다. 탑승자 11명 중 구명보트에 오른 건 잠페리니 등 3명. 물 1.5리터가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그렇게 표류가 시작됐다. 굶주림, 갈증, 폭염, 폭풍우…, 때로는 상어 떼와도 맞서야 했다. 빗물로 목을 축였고, 물고기로 연명했다. 쉬기 위해 보트에 앉은 알바트로스를 맨손으로 잡아 생살을 뜯어먹기도 했다. 그들의 바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잔혹한 격전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 수시로 출현하는 적(일본군) 전투기에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다만 눈에 띄지 않기를, 되돌아와 기총사격을 가할 만큼 연료가 넉넉하지 않기를. 갈증과 허기의 동물적 고통이 착란을 일으킬 것 같은 상상의 고통과 고립감을 잊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표류 33일째 되던 날, 한 명이 숨을 거둔다. 남은 루이스와 러셀 필립스(당시 27세ㆍ중위)는 전우의 시신을 바다에 던짐으로써 자신들의 존엄을 지켰다. 그리고 47일째 되던 날, 무려 2,000마일(3,200여㎞)을 표류한 끝에, 뭍에 닿는다. 마셜군도의 한 섬. 일본군 점령지였다.
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의 미군 포로는 100명 중 1명꼴로 숨졌지만, 일본군에 붙잡힌 포로는 3명 중 1명꼴로 숨졌다.(뉴욕타임즈, 2010. 11. 19) 그리고 그들은, 포로 가운데서도 가장 난폭한 처우의 대상인 전투기 조종사였다. 45년 8월 일본군이 항복할 때까지 2년여 간 그들은 영화에서처럼, 가혹한 구타와 고문, 모욕과 살해 협박을 견뎌야 했다.
루이스는 좀 특별했다. 그는 5,000미터 육상 미국 기록 보유자였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최연소 미국대표였다. 한마디로 이용가치가 있는 포로였다. 그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선전방송을 녹음하면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겠다며 회유도 하고 강요도 했지만 끝내 거부했다”고 말했다.(BBC, 2014.7.3) 수용소에서 그는 이질과 각기병을 앓았고 계속된 굶주림으로 기력도 쇠했지만, 일본군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툭하면 일본군과 달리기 시합을 시키곤 했다. “져도 맞았고, 이기면 기절할 때까지 맞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가디언, 2011.2.19). 키 180㎝에 57㎏이던 그의 몸무게는 1948년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올 당시 34㎏였다.(뉴욕타임즈, 2014. 7.3)
루이스 실비에 잠페리니(Louis Silvie Zamperini)는 1917년 1월 26일 미국 뉴욕의 이탈리아 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3살 무렵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 LA카운티의 토런스로 이사한다. 취학할 무렵 그는 영어에 서툴렀다. 그 탓에 아이들은 그를 툭하면 괴롭혔고, 아버지는 그에게 복싱을 가르쳤다. 그는 금세 싸움꾼이 됐고, 10대 무렵엔 마을 경찰들도 혀를 내두르는 악동이 돼 있었다. 특히 도망치는 속도는 어른들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형 피트가 15살의 그에게 토런스 고교 육상부에 들 것을 권했을 때, 그의 주된 의도는 동생을 ‘사람 만들겠다’는 거였다고 한다. 하지만 육상을 시작한 뒤 루이스는 ‘영웅’이 됐다.
1934년 LA 메모리얼 콜로시움에서 벌어진 전미 고교 육상선수권대회 캘리포니아 대표선수 선발전에서 17살의 루이스는 1마일(1,609mㆍ국제육상경기연맹이 인정하는 유일한 非미터법 공인기록 종목)을 4분 21초 2에 주파, 미국 청소년기록을 경신한다. 그의 기록은 이후 20년간 깨지지 않았다. 결승전에서 그는 4분 27초 8로 금메달을 땄고, 그 기록으로 남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진학, 36년 베를린올림픽 육상 5,000m 국가대표가 된다.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9살의 그는 당시 미국기록 보유자였던 돈 래쉬와 동시에 골인, 비디오 판독 끝에 같은 기록으로 인정 받고 대표팀에 뽑힌다. 그는 그렇게 미국 최초의 10대 올림픽 육상대표선수가 됐다. 훗날 전문 필자와 공동 집필한 자서전 내 뒤꿈치의 악마(원제는 53년 출간, 2003년 개정판)에서 그는 “챔피언이 된 것보다 뉴욕의 신문들이 그제서야 내 이름 철자를 정확히 써준 게 더 기뻤다”고 썼다.
당시 그의 기록은 세계기록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미국 대표팀으로선 그의 가능성을 믿고 올림픽 출전 경험을 쌓게 하는 데 의미를 두었을 것이다. 루이스 역시, 국가대표로서의 사명감이나 절박한 목표의식은 덜했던 듯하다. 힐턴 크리스토퍼가 쓴 히틀러의 올림픽(2011)에는 그의 말이 인용돼 있다. “나는 불황의 시대를 살았고, 집도 가난해서 샌드위치를 사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독일 가는 배 안에서는 7일 동안) 모든 음식이 공짜였다. 매일 아침마다 스위트롤과 베이컨과 계란을 맘껏 먹을 수 있었다.”(위키피디아) 올림픽 대비 훈련으로 6.8㎏이 빠졌던 그의 몸무게는 배 안에서 5.4㎏이 늘었고, 그건 육상 선수에겐 치명적인 변화였다.
제3제국 총통 히틀러가 관전하는 가운데 루이스는 5,000m 결승에서 8위를 기록한다(돈 래쉬는 13위). 하지만 그의 마지막 500m 랩 타임은 출전 선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56초였다. 그의 마지막 스퍼트가 인상적이었던지, 경기 후 히틀러는 우연히 마주친 루이스와 악수를 하며 “당신이 막판에 가장 빨랐던 선수로군”이라며 말을 건넸다고, 그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루이스는 “나는 국제정치에 어두웠고, 히틀러가 발을 구르고 툭하면 제 허벅지를 쳐대는 모습이 좀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우리 부스가 히틀러의 부스와 가까워 그의 참모 가운데 빼빼 마른 사람에게 히틀러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그 참모는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였다.(뉴욕타임즈, 2014.7.3)
올림픽 2년 뒤인 38년 루이스는 전미대학육상선수권대회 1마일 종목에 출전, 4분08초3의 기록으로 또 다시 우승한다. 그 기록 역시 이후 15년간 유지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40년 도쿄(東京) 올림픽은 당연히 무산됐다. 그는 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41년 12월) 직전 미 공군에 입대, 하와이에 배치된다. 43년 4월까지 그는 ‘그린 호넷’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B-24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미국 정부는 43년 6월 루이스 잠페리니의 전사(戰死) 전문을 그의 가족에게 보냈다. 루이스가 수용된 곳은 비공식 수용소였고, 국제적십자사도 그가 포로로 생존해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45년 극적으로 생환한 루이스는 더 큰 영웅이 됐다. 인터뷰가 줄을 이었고, 명사들은 파티 초대손님리스트의 맨 위에 그의 이름을 올리곤 했다. 전통의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 레이스는 대회 이름을 ‘루이스 잼페리니 메모리얼 마일’로 명명했고, 고향 캘리포니아 토런스 공항은 ‘잠페리니 필드’로 개명했다. 모교인 토런스 고교의 대운동장은 ‘잠페리니 스타디움’이 됐고, USC 육상스타디움은 ‘루이스 잠페리니 플라자’가 됐다. 숱한 상과 훈장, 명예학위도 뒤따랐다. 그는 46년 아내 신시아 애플화이트를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은 2001년 신시아가 숨질 때까지 해로했다.
하지만, 대다수 참전군인들이 겪는 전후(戰後)의 고통을 그 역시 비껴가지 못했다. 쇠한 체력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근육으로는 육상도 불가능했다. 악몽과 불면증, 잦은 공황 발작…. 망망대해와 포로수용소 철조망은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내면에 자리잡아 수시로 그의 일상을 공격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됐고, 신혼의 아내와 이혼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가 자신을 고문했던 자들을 찾아내 복수하자는, 다시 말해 살해하자는 생각을 품은 적도 있다고, 그는 자신의 전기 불굴(원제는 )을 쓴 로라 힐랜브랜드에게 고백하기도 했다.(가디언, 2011. 2.19)
루이스는 포로들 사이에서 ‘버드’(Bird)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일본군 간수 무츠히로 와타나베(Mutsuhiro Watanabe)를 특히 증오했다. ‘버드’는 맥아더의 전범리스트에도 오를 만큼 악랄했다고 한다. 로라는 루이스의 복수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버드’만이 자신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단 하나의 단순한 희망 즉, 그를 살해하기만 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이었다.”
그를 구원한 것은, 하지만 복수가 아니라 용서였다. 그럼으로써 거짓말 같은 그의 삶은 완벽한 영웅서사로 완성된다. 루이스는 49년 아내의 권유로 저명한 침례교 목사인 빌리 그레이엄(96)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교인이 된다. 성서와 그레이엄 목사의 감화로 그는 증오와 복수의 ‘지옥 같은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자서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증오는 스스로를 파괴한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증오하면, 그 증오는 당신 자신을 다치게 한다. 용서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지만 그 용서가 바로 치유다. 진짜 치유는 용서다.” 그는 부동산 관련 일을 하면서 열정적인 기독교 연사로 전국을 누볐고, ‘빅토리 보이스 캠프(Victory Boys Camp)’라는 청소년 선도 캠프를 세워 아내와 함께 봉사했다.
루이스는 1950년 일본 선교팀의 일원으로 도쿄에 간 적이 있다. 그 길에 수소문 된 수용소의 악연들을 초대, 자신의 용서를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버드’의 종적은 묘연했다. ‘버드’의 행적은 95년 ‘데일리 메일’의 폴 헤드필드라는 기자에 의해 드러나는데, 헤드필드는 ‘버드’가 보험중개인으로 성공해서 아내와 고급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지는 않았지만 당당하지도 않았다고 보도했다.
1998년, 81세의 루이스는 일본 나가노(長野)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성화 봉송 요청을 받고 포로시절 마지막으로 수용됐던 도쿄 북서쪽 도시 나오에츠(直江津) 캠프 인근의 봉송로를 달렸다. 그는 ‘버드’에게 메일을 보내 만날 것을 요청했으나 ‘버드’는 거절했다.
1930년대 미국 경마레이스의 전설적 챔프 ‘씨비스켓(Seabiscuit)’의 일대기를 써서 퓰리처상을 받은 전기작가 로라 힐렌브랜드는 2010년 루이스의 전기 을 출간한다. 두 권의 자서전과 숱한 인터뷰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 루이스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억압했던 아픈 기억들을 발굴하기 위해 로라는 루이스와 75차례 인터뷰했고, 그의 전우들, 포로수용소 동료들, 일본인 간수들, 이웃 주민과 학교 동창생 등을 만났다고 한다. 책은 그 해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타임’ 집계 논픽션 1위를 기록했다.
루이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려는 시도가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번번히 좌절됐다고 한다. 미국 정부기록과 육상관련 자료로 입증된 사실들은 있지만, 그의 진술에 의존한 ‘너무’ 극적인 삶의 디테일들이 역설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걸 수도 있다. 로라의 책은 그 부담을 덜어줬을 것이다.
미국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앤젤리나 졸리는 올 2월 자신이 감독을 맡아 루이스의 삶을 영화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코엔 형제가 제작을, 잉글랜드 출신의 배우 잭 오코넬이 루이스 역을 맡았다. 루이스와 졸리는 LA 할리우드의 실제 이웃이고, 또 친구였다. 두 사람은 2월 MSNBS의 ‘투데이닷컴’에 함께 출연해 각별한 친분을 과시했고, 그 자리에서 졸리는 “루이스와의 사적인 인연 때문에 더 큰 부담과 책임감을 느낀다. 왜냐면 내가 정말 루이스를 사랑하고, 그가 내 삶에 커다란 도움을 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올 크리스마스에 전기와 같은 제목으로 개봉된다.
루이스 잠페리니는 7월 2일 그의 자택에서 1남1녀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으로 숨졌다. 향년 97세.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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