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와 송승헌이 주인공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화제였던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SBS)’가 드디어 방송을 시작했다.
30부작이라는 대작 드라마가 아직 2회 밖에 방영되지 않았으니 아직 뭐라고 평가를 하긴 이른 것 같고, 다만 1~2회를 보면서 이 드라마의 설정에 잠시 멍 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현모양처’의 상징이 된 신사임당이란 존재도 사실은 남들이 뭐라 평가하건 상관 없이 여자로서의 감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드라마의 출발이자 기본 설정이 신선해서다.
드라마는 현재 시간강사이자 고단한 워킹맘으로 살고 있는 서윤주(이영애)와 조선시대 신사임당(역시 이영애)의 삶이 교차되며 각각의 삶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특히 사임당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첫사랑 스토리를 픽션으로 그려내는데, 여러 면에서 ‘현모양처 신화’와는 영 엇나간다.
일단 현모양처의 아이콘이라 하기엔 사임당이 지나치게 미인이고(성인이 되면 무려 이영애가 됨), 명화를 보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월담을 감행하는 말괄량이 캐릭터다. 그러다가 만난 옆집 도령과 알콩달콩 첫사랑 스토리까지 써내려 가고, 뭔가 어린 사임당의 인생은 그림에 대한 열정과 첫사랑의 에너지로만 가득 차 있는 듯한 설정이다.
예고편과 여러 설정을 보면서, 한국 드라마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후 스토리를 대강 예측할 수는 있다. 사임당은 어쩔 수 없는 어떤 상황을 못 이기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고, 사임당을 못 잊은 이겸은 끝까지 혼인하지 않고 첫사랑만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다시 친정에 돌아온 사임당을 만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니까 말이다.
하필이면 이 드라마가 설 연휴 직전에 시작했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명절은 며느리들(신사임당이 되길 강요받는 이들)에겐 일종의 지옥도다. 차례상 및 일가친척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노동 자체도 고달프지만, 더 힘들고 속 터지는 건 열심히 일상을 살아내던 내가 갑자기 어떤 계급사회로 순간 이동했고, 그 계급사회에서 피착취 계급으로 전락했다는 느낌이다. 이 부분이 가장 거지 같다. 게다가 피착취 계급이 된 이유가 단 하나, 시집 온 여자라서라는 게 느껴지면 온갖 사소한 일들까지 분노할 거리로 변한다.
더 나아가 남자들은 그저 모여 앉아 술 마시며 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저들의 술상과 저들 조상의 제사상을 차리기 위해 팔려온 노예 같다는 느낌에 생각이 미치면 각종 명절 증후군이 명치를 강타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시점에 사임당의 아름다운 첫사랑 스토리가 드라마 속에서 보였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은 ‘엄마’였다.
나 역시 결혼 전까진 명절에 엄마가 일 하는 게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차려준 명절 음식 먹는 것도 그저 당연했다. 엄마는 엄마니까 밥 해주는 게 당연했다. 마치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인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그 외 개인적인 사임당의 인생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결혼 후엔 생각이 달라졌다. 40년 동안 한결같이 차례상을 차리는 엄마, 게다가 이제는 아들 딸 식구들이 찾아오면 명절 내내 차리고 먹이고 ‘백년손님’인 사위를 챙기고 명절이 싫다며 악을 쓰는 시집간 딸도 챙기고 손주들을 챙기고 나중에 음식까지 싸 주는 엄마를 보면서 ‘아, 나 역시 우리 엄마를 착취하며 살아왔구나’ 라는 뒤늦은 생각이 이제서야 새삼 떠올랐던 것이다.
당연히 현모양처라고 생각했던 사임당도 발랄했던 소녀 시절 첫사랑이 있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냥 당연히 밥 해주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엄마도 그게 너무 힘들고 지겨울 수 있다. 오히려 사임당의 첫사랑을 그린 드라마 ‘사임당’의 기본 설정이 가장 현실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드라마가 더 애절해 보였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사임당’ 속에서 비현실적인 것은 40대 후반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이영애의 미모 뿐인 듯하다. 아, 또 한 가지. 20년차 배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송승헌의 연기력도.
마더티렉스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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