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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문학교육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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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문학교육 2.0

입력
2018.03.07 14:18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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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삭 기자가 쓴 ‘한국일보’ 2월 22일자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고은 시인이 후배 문인들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에 휩싸이면서 교과서에서 그의 작품을 빼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도덕성 논란을 일으킨 인사의 작품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인데, 한 쪽에서는 사생활 문제와 문학적 성과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적지 않아 교육 당국도 조심스러운 입장이다.”(성추행 의혹 고은 詩, 교과서에서 빠질까)

이 문제는 영화평론가 듀나가 ‘한겨레’ 2월 14일자에 게재한 칼럼이 제기했던 질문과 직결된다. “예술작품은 창작자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분리될 수 있을까?”(‘섹스의 윤리학’ 보여준 영화감독의 성범죄 이후)

이 논의를 이어가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전제가 있다. 바로 문제가 되고 있는 고은 시인의 명확한 사과다. 고은 시인이 작고한 지 오래라면 듀나가 제기한 논의로 직진했겠지만, 고은 시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할 수 있는 생존 작가이다. 그의 사과가 선행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이런 논의는 가해자의 잘못을 불문에 부치면서 피해자를 보이지 않게 한다. 이 논의는 고은 시인의 명백한 사과를 가정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

서동욱의 ‘생활의 사상’(민음사, 2016)에 실려 있는 어느 에세이는 저 유명한 카프카의 유언 사건으로 말문을 연다. 알다시피 카프카는 임종 직전에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원고를 다 불살라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브로트는 친구의 유언을 보기 좋게 묵살했다. 이 사건을 화제로 삼을 때 우리는 두 사람의 입장 가운데 어느 한 편에서 사고한다. 하나는 그런 유언을 한 카프카의 입장이고(‘카프카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다른 하나는 브로트의 입장이다(‘브로트의 배반은 정당했는가?’). 여기서 간과된 것은 ‘작품’의 입장이다. 흔히 작품은 창작자의 자식이라고 말해지므로 작품도 자신의 운명을 말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가끔씩 부모가 아이와 동반 자살을 했다는 끔찍한 뉴스를 접하곤 하는데, 어떤 사정에서든 부모는 아이와 동반 자살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살인이다. 마찬가지로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원고를 파기하려고 했던 카프카를 가리켜 감히 자신의 자식과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에게는 저작권이 있을 뿐, 작품에 대한 그 어떤 지배권(이를테면 해석의 독점권)도 없는 것이 맞다.

서동욱은 ‘카프카와 유작’의 관계를 ‘창작자와 예술작품’에 대한 은유와 비유로 확장하면서, “완결된 작품은 자신을 탄생시킨 작자의 손이 닿는 것을 소름 끼치게 싫어한다”고 말한다. “결국 작가란 모두 죽은 작가밖에 없다. 작가는 작품을 완결 짓는 매 순간 죽고 그의 입은 침묵으로 봉해진다. 찬사든 이해든 오해든 비웃음이든 무관심이든 증오든 악의든 유품은 사용되기 시작하며, 작가가 더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침묵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브로트는 친구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것이 아니다. 모든 작품은 완성된 순간 ‘카프카의 유품’같은 것이 된다. 수용미학의 원리를 앞세우는 이들은 이미 추문을 인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유독 공동체와 민중의 가치를 강조하는 고은의 시를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제대로 된 문학교육이라면 예술작품과 창작자의 관계와 같은 다층적인 논의에 열려 있어야 한다. ‘문학교육 2.0’은 ‘주제 찾기’라는 비문학적이고 사지선다형인 접근법과 결별해야 한다.

밀란 쿤데라는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청년사,1994)에서 “사인과 공인이 본질적으로 다른 두 세계”라며 “이 두 세계를 구분하는 커튼을 찢는 자들이야말로 범죄자들”이라고 말한다. 쿤데라의 비유는 예술작품과 창작자 사이에도 적당한 커튼이 필요하다고 말해준다. 현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국내 첫 특별전을 열고 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는 아내가 있는데도, 저녁이면 창녀를 찾아 다니는 일을 평생 동안 반복했다. 이런 경우 예술작품과 창작자 사이에 커튼이 있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작품은 작가가 죽을 때 함께 순장되거나 무덤에 넣은 부장품(副葬品)이 아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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