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어릴 땐 노점에서 파는 떡볶이를 아무렇지 않게 먹을 만큼 웬만한 떡볶이들이 크게 맵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대부분의 유명 프랜차이즈 떡볶이를 먹기가 힘들 정도로 매워졌다. 자극이란 게 그렇다. 야금야금 강해지다가 어느 순간에는 자극에 약한 사람들은 입에도 대기 힘들 정도가 된다.
음악전문 케이블채널 엠넷에서 방영 중인 ‘고등래퍼’를 보면 바로 이 떡볶이가 생각난다. 2009년 ‘슈퍼스타케이(이하 슈스케)’가 이 채널에서 처음 나온 이후 엠넷은 서바이벌 오디션 장르에서 지상파를 압도하는 기획력을 보여줬다. ‘슈스케’가 신선함이 떨어져 상품성을 잃어갈 때쯤 ‘쇼미더머니’가 나와 큰 인기를 얻었고, 여기에서 파생된 ‘언프리티 랩스타’도 화제가 됐다. 아이돌 연습생을 모아서 제작한 ‘프로듀스 101’은 대성공을 거뒀고, 이제는 랩·힙합 오디션의 또 다른 버전인 ‘고등래퍼’까지 등장했다.
이 프로그램들의 공통점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바로 ‘악마의 편집’이다. ‘슈스케’에서 궁금증을 유발하는 출연자가 나온다는 걸 한참 선전하고 뜸을 들이다가 “다음 주에 공개됩니다” 하고 마치는 건 차라리 양심적이었다. ‘고등래퍼’에서는 “잠시 후에 공개합니다” 라더니 광고 잔뜩 하고 다음주 예고로 넘어간다. 속아서 광고만 봐 준 느낌인데, 또 이걸 매주 속아넘어가는 내가 원망스럽다.
특정 출연자의 못된 성격만 부각하는 ‘악마의 편집’도 여전하고, ‘저 출연자는 방송사가 아예 띄워주기로 작정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부 출연자만 돋보이게 나오는 편집도 프로그램마다 변치 않고 일관적이다.
더 나아가 룰이 공정한가 여부도 매번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슈스케’에서는 마음대로 떨어진 출연자를 다시 붙여 주고, 붙었다고 발표한 출연자는 다시 떨어뜨리고 하더니 ‘고등래퍼’에서는 배틀 방식이 일정하지 않고 천차만별이라 또 논란이다. 누구는 프리스타일로, 누구는 신곡 발표 무대로 당락을 결정하니 보는 사람들 열 받기 딱 좋다. 서바이벌 오디션이 올림픽 무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또 ‘고등래퍼’는 적어도 ‘논란’ 면에서 역대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압도하는 느낌이 있다. 첫 회에 등장했던 국회의원 장제원씨 아들의 경우 과거 성매매 의혹이 제기돼 이후 방송분에서 모자이크 처리되며 사라져버렸다. 이 학생은 ‘쇼미더머니6’에 또 지원을 했다고 해서 노이즈 후속타까지 쳤다. 그런가 하면 과거 학교폭력의 가해자라는 증언이 속출하는 출연자(양홍원)는 마치 주인공처럼 프로그램 전개의 중심에 서서 계속 출연하고 있다.
프로그램의 험담을 하듯 이런 이야기를 쭉 늘어놓았지만, 문제는 ‘고등래퍼’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재미있다는 점이다. ‘너무 맵다’고 콧물을 흘리면서도 계속 입에 들어가는 매운 떡볶이나, MSG 잔뜩 들어간 음식이 몸에 좋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쉬지 않고 먹게 되는 것처럼.
‘고등래퍼’는 단순히 개인전이 아니라 지역별 배틀이기 때문에 만화 ‘슬램덩크’의 좌충우돌 고등학생 강백호가 전국대회 제패에 도전하는 스토리를 보는 듯하다. 그 과정에서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고등학생들의 앳되고 풋풋하며 때론 치기 어린 얼굴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재미’와 ‘자극’은 있음에도, ‘기분 좋은 즐거움’이 덜한 이유는 분명하다. 여드름 가득한 얼굴에, 되도 않는 스타일로 제 멋대로 잔뜩 멋을 부린 고등학생들의 ‘꿈’이란 게 과연 무엇인지 가끔은 섬뜩하기 때문이다. 한 탈락자의 소감은 이랬다. “평생 TV에 못 나오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TV 나왔다, 엄마~.” 이 덜 자란 아이들의 꿈은 혹시 그저 단순히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멋진 이성 친구들이 나를 쫓아다니는 그런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랩이 좋고, 평생 음악을 하면서 살 거라는 꿈은 진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른들 말 참 안 듣게 생긴 이 아이들이 엠넷, 그리고 ‘고등래퍼’의 제작진에게는 절대복종하듯 조용히 순종하는 모습이 때론 불편하다.
물론 10대의 어린 아이들에겐 진지한 꿈도 있고, 동시에 ‘유명해져서 돈 많이 벌고 이 바닥 최고가 될 거야’라는 식의 단순하고 어린 욕망도 존재할 것이다. 만일 이 프로그램이 후자를 노리는 어린 학생들(직접 참가한 학생들, 그리고 시청하는 학생들까지)을 강하게 자극하는 역할만 한다면? 아이 키우는 엄마 입장에선 매우 끔찍한 상상이다.
요즘 아이들이 ‘역대 슈스케에서 최고로 성공한 주인공은 수지’라고 진심으로 말 하는 게 때론 무서울 때가 있다. 수지는 슈스케 예선 도중 탈락했지만, 외모와 끼를 눈 여겨 본 대형기획사에 스카우트됐고, 오늘날 톱스타가 된 주인공이다. 스타가 되고 싶나? 누구에게나 그런 꿈이야 있겠지만, 그런 욕망이 대놓고 고등학생을 저격하고, 그걸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잘 팔린다면 그게 불편하고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마더티렉스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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