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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ㆍ사체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진 ‘희귀병 40대’

입력
2016.07.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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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빚 독촉에 범행 저질렀나 

화물차 기사 일하던 세자매 가장

피해자에게 도박 자금 계속 빌려

파산 선고날 흙투성이 몰골 귀가

 2. 5년 만에 발견된 사체 

공사장 폐정화조 안에 백골이…

번호판 바뀐 피해자 車에 지문

용의자 재소환 직전에 사라져

 3. 유족들 “공범 있을 것” 

체구 작고 베체트병 앓는 용의자

거구의 피해자 살해에 의문점

신분 세탁ㆍ밀항 등 다갈래 수사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벗어 던진 윗도리에 체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머리 빗 사이에 머리카락이 끼어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 무언가가 남아있다.”

친척 동생의 사라진 약혼녀 세키네 쇼코를 추적하던 전직 경찰 혼마 슌스케는 미야베 미유키의 장편 추리소설 ‘화차’에서 이렇게 독백했다. 화차는 빚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그 사람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세키네와 그 뒤를 쫓는 혼마 얘기다. 여기 세키네와 닮은 한 남성이 있다. 지난 2009년 4월 25일 전북 정읍에서 자취를 감춘 뒤 7년 넘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성모(45)씨다.

 부인 생일날 파산 선고…계속된 빚 독촉 

정읍에서 화물차 기사로 일하던 성씨에게 2009년 4월 20일은 절망의 하루였다. 그는 부인 A씨의 생일이던 이날 전주지법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빚은 갚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났고 부인과 딸 셋까지 딸린 가장에겐 파산만이 새 출발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날도 빚 독촉 전화는 어김 없이 걸려왔다. 도박판에서 속칭 ‘전주(돈 대주는 사람)’ 역할을 했던 이모(당시 37세)씨였다. 성씨가 다니던 D화물차 대표의 동생이었던 이씨는 이따금 사무실에 들러 기사들에게 도박 자금을 꿔주는 사람이었다. 파산 전날에도 성씨는 한 푼이라도 따자는 심정으로 이씨에게서 50만원을 빌렸다.

그날 밤 부인 A씨 눈에 성씨의 행적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전주에서 재판을 마치고 오후 5시 20분 정읍에 도착했다던 남편은 오후 8시가 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성씨를 찾으러 30분 후 화물차 사무실에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시 1시간이 지나 집에 돌아온 성씨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머리카락과 바지가 흥건히 젖은 데다 옷도 흙투성이여서 마치 흙탕물에서 구른 사람 같았다. A씨가 손등에 상처까지 입은 남편에게 “무슨 일이냐”고 걱정스레 묻자 성씨는 “넘어져서 다쳤다”고만 했다. 자는 줄 알았던 성씨는 이튿날 오전 2시 30분 또 사라졌다. 처음 보는 흰색 SM3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 남편은 1시간쯤 뒤 들어와 다시 잠을 청했다.

비슷한 시간 이씨 부인 B씨와 형 이모(49)씨는 애타게 남편과 동생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20일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선 이씨가 휴대폰을 꺼둔 채 다음날 아침까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에 실종 신고부터 한 이씨는 동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무실을 유심히 살펴봤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과 바깥 마당 곳곳에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가 동생을 죽인 뒤 시체를 들고 도주했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단순 실종은 즉각 강력 사건으로 전환됐다. 경찰은 성씨를 의심했다. 21일 곧바로 그를 불러 조사를 하니 살인 후 시체 유기가 이뤄졌을 거라고 추정되는 21일 오전 2시 30분부터 오전 4시까지 성씨와 아내 A씨의 진술이 엇갈린 탓이다. A씨는 그 시간에 “남편이 차를 타고 나갔다”고 했지만, 성씨는 “집 근처에서 맥주를 마셨다”고 둘러댔다. 번호판이 바뀐 채 정읍 아산병원에 세워져 있던 이씨의 SM3 차량 안에서도 성씨의 지문이 발견됐다. 성씨가 이씨와 빚 문제로 다투다 이씨를 죽이고 시체를 어딘가에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성씨가 도주 경로를 들키지 않으려 이씨 차에 다른 차 번호판까지 훔쳐 달았다고 경찰은 추정했다.

 사라진 살인범, 나타난 사체 


하지만 경찰이 성씨를 재소환하려던 24일 그는 이미 도피 계획을 짜놓은 상태였다. 성씨는 이날 정읍 신태인 역 앞에서 부인과 딸들을 만났다. 가족은 전북 부안터미널 근처 한 모텔에 묵은 뒤 25일 오전 10시 헤어졌다. A씨는 “남편이 2,3일 머리를 식히고 온다고 해서 현금 10만원과 현금카드 1장, 양말과 속옷 등을 사주고 헤어졌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가족과 만남을 마지막으로 성씨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수사의 변곡점이 된 건 실종 5년 만에 나타난 이씨의 백골 사체였다. 사체는 2014년 7월 16일 사건 발생 장소로 추정되는 D화물차 사무실에서 불과 3㎞ 떨어진 공사장 폐정화조 안에서 발견됐다. 현장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된 것이었다. 사체의 유전자정보(DNA)는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이씨 혈흔 속 DNA와 일치했다. 사체 좌우 늑골 10여곳에 예리한 흉기 자국이 있었고, 걸친 옷에서도 흉기에 찔린 구멍이 있었다. 1년 뒤 이른바 ‘태완이법(살인죄 공소시효 폐지)’이 통과되자 다시 경찰은 성씨 소재 수사에 집중했다.

 신분 세탁 후 밀항? 공범이 살해? 꼬리 무는 의문들 

경찰은 2009년 이후 성씨를 추적하고 있지만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이씨 살인 사건은 현재 피의자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 상태다. 경찰은 성씨가 신분을 세탁해 국내에 살고 있거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밀항했을 시나리오에 무게를 두고 있다. 초동수사를 했던 전북 정읍경찰서 고영호 경위는 “성씨는 희귀질환인 베체트병을 앓고 있어 꾸준히 약을 복용해야 했다. 건강보험관리공단에 의뢰해 베체트병 환자 명단을 싹 다 뒤졌으나 성씨로 의심되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었다”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성씨는 정읍에서 민간방범대원으로 3년간 근무해 경찰의 생리를 잘 알고 있어 충분히 타인 신분으로 살아갈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했다.

반면 피해자의 형 이씨는 성씨 외에 공범이 더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이씨는 “동생이 돈을 빌려준 사람이 많아 원한관계가 많았을 것”이라며 “체구도 작고 몸이 약한 성씨가 거구의 동생을 흉기 하나로 제압했다고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성씨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 공범에 의해 성씨도 살해당했을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성씨가 검은 과거를 지우고 새 삶을 살고 있더라도 언젠가 정읍에 남아있는 가족이나 지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 흔적을 포착하는 것이 사라진 성씨를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인 셈이다.

정읍=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이 기사는 과거 수사 기록, 담당 형사ㆍ유족의 설명을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관련 제보는 전북경찰청 미제팀 (063)280-9371.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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