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깨졌다. 연말정산 파동을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증세 없는 복지' 기조는 위기를 맞았다. 월급쟁이들의 분노로 점화된 조세 저항의 근본 원인은 증세를 증세라 부르지 못하게 만든 무리한 대선공약에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 솔직하지 못했을까? 박근혜정부 주요 인사들의 발언을 계기로 '증세 없는 복지' 논란을 되짚어 봤다.
■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
'증세 없는 복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19대 대선에서 박 대통령은 '준비된 여성 대통령' 슬로건을 강조했다. 기초연금, 4대중증질환지원, 무상보육 등 복지정책을 증세 없이 수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대통령이 말하는‘증세 없는 복지’의 뜻은 뭘까? 세목 신설이나 세율의 상향조정 없이 지하경제 양성화, 비과세·감면 정비, 세출 구조조정으로 복지재원을 마련한다는 게 골자다. (▶기사보기)
■ '증세 불가'에 쐐기 박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 마자 '증세 없는 복지'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박 대통령의 집권 4년 동안 복지 공약 이행을 위해 필요한 복지 재원만 135조원. 조세전문가와 야당은 물론, 여당 내부에서도 직접 증세 없이 이를 충당한다는 게 무리라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증세 불가피론'에 대해 박 대통령은 쐐기를 박았다. 2013년 2월28일, 박 대통령은 "자꾸 증세 얘기만 하는데 실제로 이렇게 줄줄 새는 탈루, 이런 것에 대한 관심을 먼저 기울이는 게 당연하다"며 "국민 세금을 거둘 것부터 생각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기사보기)
■ 박근혜정부 세금정책의 첫 단추
2013년 8월 박근혜정부는 기존의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는 '세법개정안'을 발표했다. 연소득 3,450만원 이상인 근로자의 세금을 더 걷어 저소득층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연소득 3,450만원을 고소득자로 볼 수 있느냐”는 비난이 거셌다. 당시 세제개편을 주도했던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뽑는 수준으로 만든 게 이번 세제개편안”이라고 발언해 비난여론을 키웠다. 여론이 악화되자 정부는 3일 만에 세금이 늘어나는 소득 기준을 5,500만원으로 올리겠다는 수정안을 내놨다. 이 세제개편안이 적용된 게 ‘2015년 연말정산’이다. (▶기사보기)
■ 현실 벽 실감한 박근혜표 복지정책
2013년 9월 통과된 기초연금법.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에서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법안에선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해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월 10~20만원을 차등지급하기로 했다. 공약이 대폭 후퇴한 것이다. 공약 후퇴과정에서 박 대통령과 마찰을 빚은 진영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사퇴했다. 진 전 장관은 "국민연금과 연계된 기초연금안에 대해 계속 반대 의견을 피력해 왔는데 장관으로서 어떻게 국민과 국회, 야당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공약 후퇴에 따른 비판 여론도 거셌다.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통해 공약 후퇴를 사과하면서 사태는 일단락 됐지만, 대선과정에서 표를 얻기 위해 부풀려진 복지 공약의 예산 해결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기사보기)
■ 담뱃값 인상 이유는 국민건강? 세수확보?
2014년 9월, 담뱃세 인상안 발표는 박근혜정부의 '서민증세'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담뱃값이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오르면 세수는 2조8,300억원 가량 늘어난다. 그러나 정부는 "담뱃값 인상으로 들어오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금연 정책에 사용할 것"이라며 세수 목적으로 담뱃값을 올린 게 아니라고 거듭 부정했다. 정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비판은 거셌다. 간접세인 담뱃값 인상으로 손쉽게 세수 부족분을 메울 수 있지만 담배 주 소비층인 서민층에게 세부담이 더해진다는 우려가 커졌다. (▶기사보기)
■ 벽에 부딪친 박근혜표 무상복지
2014년 11월, 중앙정부와 지방교육감들의 예산전쟁이 벌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누리과정 예산 지원을 국고에서 하느냐,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서 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정부가 대선공약인 누리과정의 예산을 지방자치단체에 떠넘기면서 이미 시행중인 무상급식 예산이 볼모가 된다는 비판으로 번졌다. 결국 중앙정부가 누리과정에 5,000억원의 예산을 지자체에 추가 지원하기로 했지만, 올해에도 정부가 지방세 개편의 뜻을 밝힌 만큼 같은 논란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사보기)
■ '연말정산'은 왜 '세금폭탄'이 됐나
2015년 1월 연말정산의 후폭풍이 거세다. 정부 예상과 달리 연소득 5,500만원 미만 근로자들도 환급액이 줄거나 토해 내는 등 '13월의 보너스'가 '13월의 세금폭탄'이 됐다는 아우성이 빗발쳤다. 정부가 2013년 세법개정 당시 세수 추계 시뮬레이션에 정확성을 가하지 않았고, 근로자 개인별 상황에 따라 세금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중산층 쥐어짜기 논란이 거세지자 정부는 부랴부랴 보완책을 발표하고 사과했다. (▶기사보기)
■증세를 증세라 부르지 않는 ‘궤변’
연말정산이 대표적인 ‘중산층 쥐어짜기’라는 비난이 거셌지만, 정부는 ‘증세가 아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증세 없는 복지’ 프레임이 국민을 기만한다는 불신이 강해지면서, 박근혜정부의 견고하던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다. 때문에 정부가 증세 필요성을 인정하고 실질세율과 법인세 등을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4년간 실효세율을 살펴보면 소득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월급쟁이들의 세 부담은 꾸준히 늘어난 반면, 법인세 부담은 줄었다. 2007년 MB정부의 법인세율 인하 이후 다양한 감세 혜택이 원인이다. (▶칼럼보기)
■ '증세'를 '증세'라 불러야 할 때
정부의 ‘우회증세’가 오히려 국민 불신을 낳고 ‘꼼수증세’ 비판을 가열시키고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증세없는 복지'의 허구성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근혜정부의 “증세는 없다”는 주장이 이미 설득력을 잃었다는 얘기다. 정치권에서도 정부가 복지 공약 이행을 위해 증세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미 “증세 없는 복지는 없다”며 “대선 공약의 잘못된 점을 인정하라”고 청와대를 압박하고 있다.
청와대는 여전히 ‘증세’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고수한 채 증세와 복지 구조조정에 대한 해법의 공은 정치권으로 넘긴 상태다. 증세와 복지 우선순위를 놓고 당정은 물론 여야 이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만큼, 우선순위에 대한 면밀한 점검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기사보기)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증세와 복지 구조조정을 동시에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5일 한국일보의 긴급설문에 의하면, 국내 재정 전문가들은 세금 부문에서는 법인세 원상복귀를 골자로 하는 비과세-감면 혜택을 먼저 손보고, 복지 구조조정 부문은 고교 무상교육 보다 비용 대비 효율성이 큰 유아보육에 우선 순위를 두는 등 전반적인 ‘전략 수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기사보기)
김지현기자 hyun16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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