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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진격" 발언이 "해주 점령"으로 둔갑... 100만명 목숨 건 기만극

입력
2020.07.02 04:00
수정
2020.07.02 09:26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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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주점령 오보의 파장과 영향

편집자주

삶의 뿌리가 통째로 뽑힌 동족상잔의 비극이 꼭 70주년을 맞았다. 임진왜란, 6.25전쟁 등 한반도 격전지 답사에 천착해온 한국일보 출신 원로 언론인 문창재 칼럼니스트가 알려지지 않은 6.25 비극을 6회로 나눠 싣는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은 지난달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6.25전쟁 참전자 묘역에 찾는 이 없이 적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뉴스1

6.25전쟁 70주년을 맞은 지난달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6.25전쟁 참전자 묘역에 찾는 이 없이 적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뉴스1


북한 인민군 남침보도 제1보는 HLKA 서울중앙방송국 오전 7시 뉴스였다. “금일 오전 4시부터 8시 사이에 북괴는 삼팔선 전역에서 불법남침을 자행하였다. 옹진 개성 장단 의정부 동두천 춘천 강릉 등 각 지구 정면에서 북괴는 남침을 개시하고, 동해안에서는 상륙을 기도하였다···.”

이어 “국군은 전역에서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긴급하고도 적절한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은 동두천 정면에서 탱크까지 동원하여 침입하였으나 우리의 대전차포에 의하여 격퇴되고 말았다.····· 전 국민은 군을 신뢰하고 미동함이 없이 각자의 직장을 고수하면서 군 작전에 주력 협조하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똑같은 내용이 25일자 신문호외와 26일자 조석간에 이선근(李瑄根) 국방부 정훈국장 발표문으로 실렸다. 라디오와 다른 내용은 “군에서는 명령이 없어 삼팔선을 넘어 공세작전을 취할 수 없는 고충이 있으니, 전 국민은 안심하고 국지적 전황에 특히 동요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전면남침이라면서 삼팔선을 넘어 공격할 수 없는 고충이 있다니···.

27일자 각 신문에는 국방부 발표를 근거로 “옹진방면 국군 일부가 해주시를 점령했다”는 기사가 큰 제목으로 장식되었다. 동아일보 1면 가로 제목은 ‘국군정예 북상(北上) 총 반격전 전개’였다. 세로 제목은 ‘해주시를 완전 점령’이었다. 기사 전문(前文)은 이렇다. “천인공노할 공비의 대거남침에 대하여 우리 국군은 육·해군의 긴밀한 협동작전을 전개하여 전선을 정리하는 동시에, 각 전선 도처에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큰 제목 ‘국군일부 해주 돌입’, 부제 ‘적 사살 1580명, 전차 등 격파 58대’였다. 경향신문은 톱 제목이 ‘燦(찬) 아군 용전에 괴뢰군 전선서 패주 중’, 부제는 ‘삼군 패적 맹추, 일부는 해주시에 돌입’이었다. 국방부는 26일 오전 11시 이런 보도 자료를 낸 뒤 오후에 옹진주둔 17연대가 인천으로 철수한 사실을 알리지 않아 국군 17연대 해주점령을 기정사실화했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아사히신문' 'BBC' 등 해외 언론도 큰 뉴스로 다루었다.

28일에도 황당한 보도는 계속되었다. 조선일보는 28일자 1면에 ‘제공권 완전장악/국군 의정부를 탈환’이라고 보도했다. 이 역시 국방부 발표 자료를 전재한 것이었다. 방송에서는 “해주점령에 이어 평양 원산을 향하여 진격 중”이라는 뉴스까지 나왔다. 사실과 크게 다른 이들 전황보도 가운데, 제일 큰 파동을 일으킨 것이 국군의 해주점령 보도였다. 북한 땅인 해주를 완전 점령했다니, 북침을 주장하기에 이보다 좋은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북한은 이 기사를 근거로 두고두고 북침을 주장하고 선전했다.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일부 수정주의 학자들도 이 보도를 인용해 한국에도 귀책사유가 있다고 보았다. 한 무책임한 부대장의 큰소리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윗사람 듣기 좋게 인용되었고, 위로 보고될 때마다 조금씩 각색되어 사실처럼 굳어졌다. 형편없이 쫓기는 전황 속에 작은 전과를 침소봉대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아부의 산물이었다.

전쟁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포옹하는 남북 형제상. 누가 형제를 싸우게 했나. 문창재 제공

전쟁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포옹하는 남북 형제상. 누가 형제를 싸우게 했나. 문창재 제공


해주점령설의 진원은 취재차 옹진 17연대에 갔던 연합신문 최기덕(崔起德)기자 전언이었다.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국지적 충돌이 잦았던 옹진 지구에 자주 드나들었다. 25일 현지에 있던 최 기자는 옹진읍내 여관에 투숙 중 6·25를 만났다.

“여관에 들었는데 새벽에 포성에 놀라 잠을 깼습니다. 8시 30분 쯤 17연대 본부로 가서 백인엽(白仁燁) 연대장을 만났습니다. 그는 전면전쟁인 것 같다면서 ‘이 백인엽이는 부대병력을 이끌고 해주로 결사 돌입한다고 전해 주시오’ 합디다.·····서울에 와 저녁때 국방부에 들렀는데, 보도과장 김현수(金賢洙) 대령이 옹진전황을 물어요. 오면서 들으니 육본이 벌써 후퇴명령을 내렸다는데, 백 연대장은 해주로 진격한다고 할 정도로 사기가 높더라고 말한 게 다인데, 해주점령이라고 보도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한국언론자료간행회 '한국전쟁 종군기자')

최씨는 뒷날 KBS 인터뷰에서 “연대장의 말을 전한 것뿐인데 어떻게 된 거냐고 김 대령에게 따지니, 이왕 그렇게 된 것 사기앙양을 위해 그냥 두자 하더라”고 말했다. 김 대령은 다음날 방송국에서 대민방송을 하던 중 방송국을 장악하러 온 인민군과 교전 중 순국했다. 최씨와 연대장 백씨도 고인이 돼 이 문제는 미궁에 빠지게 됐다.

서울 정동 옛 중앙방송국 현관에 서있는 중계차. 자료사진

서울 정동 옛 중앙방송국 현관에 서있는 중계차. 자료사진


보도과장은 국방부 출입기자들과 친숙한 관계다. 전쟁발발 당일 옹진에 다녀온 기자를 반가이 맞아 전황을 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윗사람이 차례로 그 위로 보고할 때마다 조금씩 부풀려졌을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단계에서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 같다.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그 사실을 국회에서도 사실처럼 보고했다. 5·30 총선으로 구성된 제2대국회 본회의가 26일 오전 11시 개회되었다. 이 자리에 출석한 두 사람은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톤으로 보고했다.

특히 채 총장은 “우리 국군은 해주에 돌입했고, 의정부 북쪽에서 적을 제압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슨 근거에서였는지 “사흘 안으로 평양을 함락시키겠다”고까지 했다. 같은 날 야간국회에도 그랬다. 피란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급했던 국회의원들이 꼬치꼬치 전황을 캐묻자, 그는 “일부 전선에서는 불리하지만 3~5일 이내에 평양까지 점령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의 강력한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말을 바꾸었다. 신 장관은 전황을 낙관적으로 설명하면서도 ‘정부를 옮길 가능성’을 내비쳤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었던 황성수(黃聖秀) 의원이 27일 아침 채 총장 집으로 찾아가 진상을 묻자, 그는 “빨리 피란을 떠날수록 좋습니다”하며 손짓을 했다.

전쟁기념관 명비 벽을 가득 메운 전몰자 명단. 이 명단은 극히 일부다. 문창재 제공

전쟁기념관 명비 벽을 가득 메운 전몰자 명단. 이 명단은 극히 일부다. 문창재 제공


해주점령 보도는 즉각 작전에 영향을 미쳤다. 방송을 청취한 춘천의 6사단은 상황이 호전된 것으로 믿었다. 28일 춘천을 철수할 때 소양강 다리를 폭파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온양 주둔 25연대는 서울차출 명령을 받고 상경하면서 탄약조차 챙겨오지 않았다.

국민에게 끼친 악영향은 다 계량할 길이 없다. 정부 말을 믿고 피란을 가지 않은 100만 서울시민들이 적치 3개월 동안 당한 고초, 인민군 병사로 징집되었거나 납북된 수십만 시민과 요인, 또는 인민재판이란 희한한 살인극에 희생된 사람들과 납북자들 비극을 어떻게 수치로 나타내겠는가.

해주진격 발언의 파장을 의식한 백 17연대장은 생전 그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2009년 '국방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해상으로 철수하느라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 육군본부를 찾아갔더니, 채 총참모장이 ‘너희 부대는 해주로 돌입했다고 보도됐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요. 무슨 말인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개전 초 라디오 방송에서 우리 부대가 북진 중이라고 요란하게 떠들었다는 거예요. 참 기가 막혀서···”라고 했다.

‘의정부 탈환’ 보도는 완전한 기만극이었다. 국방부 정훈국 선우진(鮮于珍·예비역중령) 소위는 그때 가두방송 선전요원이었다. 27일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李瑄根) 대령에게서 의정부 사수독려 방송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적 전차를 모조리 부숴버릴 예정이니 정오까지 의정부를 지키도록 독려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정부는 이미 떨어졌고, 창동도 위태로웠다.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남으로 가는 도로를 가득 메운 피란민 행렬. 자료사진

남으로 가는 도로를 가득 메운 피란민 행렬. 자료사진


돌아오는 길에 창경원 담벼락에 나붙은 ‘국군 의정부 탈환’ 벽보를 보았다. “B-29는 꼴도 못 봤습니다. 창동도 벌써 무너졌을 겁니다.” 선우 소위의 울음 섞인 항변에, 이 국장은 “수고 많았다”고만 했다. 이미 ‘의정부 탈환’이 방송된 뒤였다.

위급상황에서는 신속한 상황파악이 생명줄이다. 국민에게까지 뻔한 거짓말을 거듭한 심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국난을 당할 때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정부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언제까지 당해야만 하는지, 국민 노릇은 참으로 어렵기만하다.

문창재 칼럼니스트(전 한국일보 논설실장)

미지 캡션을 입력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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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4년 한국일보 논설실장으로 퇴직한 후 내일신문 객원논설위원을 거쳐 올해 3월까지 논설고문으로 일했다. 저서에 '정유재란 격전지에 서다' '증언(바다만 아는 6.25 전쟁비화)' '나는 전범이 아니다' 등 10여권이 있다. 

<글 싣는 순서>

(1) 인민군은 왜 서울에서 사흘을 머뭇거렸나
(2) 해주점령 오보의 파장과 영향
(3) 남진을 주춤거린 동해안 축선
(4) 대통령 떠난 뒤 ‘서울사수’ 방송
(5) 미 사단장 딘 소장 실종사건
(6) 이형근 장군이 본 10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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