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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공화국 찬가

입력
2016.03.2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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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보다 큰 어떤 것이 아닐까. 그 큰 어떤 것을 끝내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 알 수 없는 운명이 궁금하여 점을 치고, 신의 가호를 얻기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이 감내하기에 신은 너무 오래 침묵한다. 신이 영원에 가깝도록 침묵할 때,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이 해 볼 수 있는 것이 정치다. 그래서 정치는 인간의 자력구제행위다. 15세기 피렌체의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공화국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 피렌체에서는 자력으로 공적인 영예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모든 시민들에게 똑같이 있다고. 그 영예를 향한 희망이 모두에게 열려 있을 때 시민들은 스스로 고양된다고.

이 땅의 사람들도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자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공화국을 만들었다. 군주정을 그리워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다수가 합의한 공화국의 땅 위로 국가폭력이 자행되었고, 그 핏자국을 딛고 제3세계가 부러워하는 산업화를 이루었다. 이제 21세기가 되었고, 선거철이 오면 모두 과거를 고해하는 마음으로 홀로 기표소에 들어가야 한다. 유명 정치인들 중에는 간혹 부부가 배시시 웃으며 함께 투표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마저도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홀로 기표소에 들어가야 한다. 공공화장실과 마찬가지로 기표소는 국가가 운영하는 고독의 공간이다. 화장실에서 홀로 변비를 신음하며 자신의 개인적인 똥을 공공의 변기에 흘려 보내듯, 기표소에서 홀로 얼룩진 현대사를 신음하며 자신의 한 표를 공화국의 식도로 흘려 보내야 한다. 이 고독을 통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사적(私的) 개인을 넘어 마침내 공화국의 시민이 된다.

그 고된 과정을 거쳐 선출된 정치인들은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유권자들의 염원에 대해 오래 침묵한다. 이 선거구에 뼈를 묻겠다던 경쟁자들은, 선거에서 패하자마자 묻었던 뼈를 수습하여 어디론가 떠나기 바쁘다. 그리고 남은 유권자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미필적 무골호인(無骨好人)이 된다. 무골호인이 되기를 거부한 시민에게 남은 길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혁명을 꿈꾼다. 그러나 20세기를 지나온 사람들은 알고 있다, 진격과 강철대오의 구호만으로는 인간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신이 침묵하고, 정치인들이 무책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거세된 시대에, 이민을 가지 않고 이 땅에 남아 공적인 시민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희망 없이 공화국을 사랑하라. 이번 생에는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채로, 공화국을 사랑하라. 신의 침묵과 정치인의 무책임을 은쟁반에 올려 둔 채로, 통제 불능의 운명에 참여하라. 21세기 공화국의 시민은 패배할 줄 알면서도 투표에 참여하는 시민군이다. 이제 이 땅에 진정한 공화주의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투표소를 향해 진군하는 비극적 영웅이다.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햄릿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진한다는 점에서 돈키호테다. 21세기 이곳의 시민은 자신으로 하여금 산업사회 소비자의 메마른 일상을 초월해 고전 비극의 영웅이 될 기회를 마련해 준 이 공화국의 미덕을 찬미한다. 한국에서는 자력으로 비극적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모든 시민들에게 똑같이 있다고. 그 비극적 전망이 모두에게 열려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고양된다고.

21세기 이곳의 시민은 더 이상 신전에 엎드린 예배자도 아니고, 운명의 자결권을 행사하는 피렌체의 시민도 아니며, 그저 새로이 도래한 동아시아의 비극적 영웅일 뿐이니, 투표일이 오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 투표소를 향해 행군하라. 국가가 세금을 써서 꼼꼼히 작성한 투표인 명부에 출석체크를 하고, 기표소 안으로 홀로 진군하라. 공화국에 대한 영웅적 애정을 담아,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라. 인주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투표용지에 아름답고 붉은 키스마크를 남겨라. 공화국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라, 희망 없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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