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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1977년의 은희경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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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1977년의 은희경을 되돌아보다

입력
2019.09.02 18:00
수정
2019.09.03 18:11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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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 소설가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독립서점에서 밝은 표정으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희경 소설가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독립서점에서 밝은 표정으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1995년, 은희경(60) 작가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에서 냉소를 이렇게 정의했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그로부터 25년 가까이 지난 올해, 새 장편소설 ‘빛의 과거’를 내놓은 작가는 “냉소라고 하지만, 결국 회피였던 것은 아닌지” 고쳐 묻는다. 작가에게 이번 소설은 냉소적이었던 자신에 대한 반성문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독립서점 아침달에서 은 작가를 만났다.

은 작가가 ‘태연한 인생’ 이후 7년 만에 장편소설 ‘빛의 과거’로 돌아왔다. 소설은 1977년 숙명여대 기숙사와 40년뒤인 2017년을 배경으로 한다. 2017년의 ‘나’는 1977년 기숙사에서 함께 살았던 소설가 친구가 당시를 배경으로 쓴 소설을 읽으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러나 자신의 기억과는 너무도 다른 친구의 소설을 보며 “나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살아왔던 걸까”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친구의 소설과 자신의 기억을 교차 복기하며, ‘나’는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나의 과거를 어떻게 보는지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과거는 못 바꾸지만 과거를 해석하는 나의 관점은 바꿀 수 있잖아요. 그때의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만이 삶을 다시 해석할 수 있는 방법 같아요. 지금 보는 풍경은 빛이 만든 풍경이고, 이 빛은 과거에서 온 빛이죠. 그 빛을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지금의 좌표를 결정짓는달까요.”

년 만에 새 장편소설 ‘빛의 과거’ 낸 은희경 소설가. 박형기 인턴기자
년 만에 새 장편소설 ‘빛의 과거’ 낸 은희경 소설가. 박형기 인턴기자

소설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고, 롱부츠가 유행했던, 그리고 제1회 대학가요제가 시작된 동시에 수많은 대학생들이 연행되거나 수배되어 갔던 긴급조치 9호의 시대를 세밀화처럼 묘사한다. 이 같은 재생은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숙명여대 기숙사에 살았던 은 작가 자신의 경험이 있어서 가능했다. 여기에 소설의 주인공처럼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던 덕에 남아있던 취재수첩이 소설의 근간이 됐다. 은 작가는 “오히려 너무 자료가 많아서, 이 많은 블록 중에 뭘 골라 써야 할지 고민하는 데 오래 걸렸다”며 웃었다.

“그 시절 기숙사를 배경으로 소설을 써야겠다고는 늘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무엇을 위한 이야기인지를 몰랐죠. 추억담일 리도, 그렇다고 세태소설일 리도 없고. 왜 나는 이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지를 계속 생각하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그러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고 깨달았어요. 그 시절 주인공이 도피해 버려서 답을 내지 못한 질문에 대해, 2017년에 답하는 이야기가 되어야 하겠구나, 하고요. (제 대학시절) 규율과 억압의 시대에 적응하고, 좌절하고, 안전하게 살려고 체념해버렸기 때문에 지금 20대들이 감당해야 될 것들이 많아진 게 아닌가 싶어서요. 40년 전 이야기가 현재 조금이라도 위로로 느껴진다면 아마 제 반성문이 제대로 가 닿았다는 거겠죠.”

년 만에 새 장편소설 ‘빛의 과거’ 낸 은희경 소설가. 박형기 인턴기자
년 만에 새 장편소설 ‘빛의 과거’ 낸 은희경 소설가. 박형기 인턴기자

여대생은 그 어떤 존재보다 상투성과 편견으로 표현되기 쉽다. 철부지인 속물 날라리부터, 조신한 장로님 딸, 자기모순적인 페미니스트 등, 소설은 납작한 시선을 넘어서 당시의 다양한 여대생 캐릭터를 되살려낸다. “부담이 없진 않았어요. 여대생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소설은 아니니까, 리얼리티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내가 하려는 얘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죠. 하지만 궁극적으로 여성 악역은 없어야 했어요. 결국 다들 70년대라는 환경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고자 한 거거든요. 여성 인물에게 보내는 제 나름대로의 연대감이죠.”

소설의 마침표를 찍기가 쉽지 않았다. 개인적인 슬럼프도 영향을 끼쳤다. 원고를 고치는 과정에서 왼쪽 눈의 망막에 구멍이 났고, 무엇보다 책의 저자가 되는 일에 의욕을 잃었다. 과거의 낭만에 사로잡히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를 갱신하는 소설적 태도 덕에 다시 앞으로 나아올 수 있었다. “세상은 계속 변하고, 지금껏 잘못 알아왔던 것도 너무 많아요. 그런데 그걸 일깨워주는 게 소설이잖아요. 사람은 계속 갱신돼야 해요. 쓰는 사람 이전에 읽는 사람으로서, 소설이 없으면 전 형편없는 인간이 될 거 같아요. 아직 작가로서 하고 싶은 말과, 갖고 있는 얘기가 많아요.”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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