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관혼상제(장벽을 헐자/분단 45년… 북의 삶과 풍습 살펴본다:2)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관혼상제(장벽을 헐자/분단 45년… 북의 삶과 풍습 살펴본다:2)

입력
1990.01.05 00:00
0 0

◎결혼 17세이상 가능… 연애ㆍ중매 4대6꼴/“제사는 낭비”… 통제하다 70년후 다소 완화/3일장이 보통… 화장 거의없어관혼상제의 풍습이나 형식은 그사회의 사람사는 모습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의 관혼상제는 유교적 전통에 따라 전래의식을 대체로 지키고 있으나 경제여건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많이 간소화된게 특징이다.

북한당국도 허례허식과 낭비적 요소를 없앤다는 이유로 사회주의 사회건설에 적합한 형태로 관혼상제의 풍습을 변질시켰다.

북한의 청춘남녀들은 17세이상(공민증 발급대상)이면 결혼이 가능하다. 김일성은 노동력확보를 위해 남자 29세,여자 26세로 결혼연령을 제한했었으나 불만이 많아 80년대 이후에는 조혼추세이다.

지난해 9월 귀순한 임정희씨(25ㆍ여ㆍ개성시 간호원)에 의하면 대부분 북한여성들은 23세를 결혼적령기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남자들이 『여자나이 23세는 금값,24세는 은값 25세는 동값,26세는 똥값』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배우자 선택은 연애와 중매결혼이 4대6정도라는데 직장과 학습,교육 등을 통해 남녀가 사귈수 있는 기회가 많아 통제사회에도 불구하고 연애결혼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신랑감으로는 평양거주자가 직업에 관계없이 으뜸으로 꼽혔으나 80년대초부터 평양의 인구와 주택난 때문에 평양총각과 시골처녀간의 결혼을 정책적으로 막았으며 시골처녀와 결혼한 평양남자는 시골로 내려가는게 보통이라고 귀순 북한군소위 김남준씨(27)는 전했다. 그래서 도시와 농촌간의 결혼교류가 거의 없어 농촌 탄광 등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죽어도 농포(농촌사람을 비하해서 부르는말)」라는 자조섞인 말이 있다는 것. 당간부자녀 군관(장교) 외화벌이종사자 등이 배우자로 인기가 높고 성분이 결혼에 큰 장애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당간부자녀는 같은 계층끼리 통혼하는게 보통이어서 능력이 우수하다해도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 등은 거의 이뤄지지 못한다.

약혼식은 남아있는 편이나 택일 사주 궁합 등 풍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보통 휴가기간을 이용해 혼례식을 갖는다. 남한에서는 시골에서도 거의다 예식장을 이용하지만 북한에서는 도시지역에 「결혼식당」이라는 예식장소가 있을뿐 대개 양쪽집에서 혼례를 치른다. 그러나 사모관대 등 전통적 의식은 찾기 힘들고 양복과 한복차림이 대부분.

신랑이 직장에서 내준 승용차편으로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데려오는 것으로 혼례가 시작된다. 신부집에서 잔칫상을 받고 신부를 그날로 신랑집에 데려온다.

결혼식당에서 하는 혼례식에서 특이한 점은 주례가 별도로 없고 흥겹게 먹고 즐기는 피로연 자체가 결혼식이라는 것이다.

지난8월 미주한국방송(KTE)이 취재해 국내에도 소개된 평양에서의 결혼식장면에서는 양복 한복차림의 신랑신부가 「합환주」를 한잔씩 수줍게 교환하는 정도로 식이 끝나고 이어 흥겨운 노래판이 벌어졌다. 친구들이 여행가방 같은것을 선물했는데 그속에는 과자 사탕류가 가득차 있었다.

결혼식에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서약은 의무적인게 아니라고 귀순자들은 전했다. 귀순자들은 신혼여행,폐백이라는 말을 남한에서 처음 들어봤다는데 보통 하루정도 그지역에서 관광을 함께한다.

혼수는 신랑측이 신부저고리 1벌,신부측이 이불장,부엌살림,양복지 1벌정도. 주택배정을 받을때까지 부모와 함께 사는데 뇌물을 주면 1∼2년안에 배정받을수 있다고한다.

장례의식은 보통 3일장으로 치르는것과 친척 친구들이 밤샘하며 문상하는 전래의 풍습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화장은 거의없고 묘지는 지정된 공동묘지를 써야한다. 농촌에서도 상여는 사라졌고 도시는 녹화사업소,농촌은 편의협동조합이 장례절차를 도맡아 처리해준다. 동사무소에서 약간의 쌀과 술을 지원받는데 가까운 친척들은 부의금대신 쌀,술을 부조하는게 보통이다. 상복은 따로 없고 굴건과 상장을 한다. 문상객들은 주패(트럼프)놀이 등으로 밤을 새워준다. 곡을 하고 영정에 절을 두번하는 것은 다름이 없으나 향이 귀해 분향하는 모습이 별로 없다고 한다. 또 여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는 등 여행절차가 까다롭고 통신수단이 발달되지않아 친척들이 모두 모이기가 힘들다.

통제를 받았던 제사는 그동안 은밀히 치러지다가 70년대부터는 추석성묘와 직계가족에 대한 탈상까지의 제사가 묵인되고 있다. 보통 사망후 3년까지는 친척들이 모여 간단한 제사를 지내나 그후에는 장남만이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제사에 대해 김일성은 74년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것은 낡은 풍습이다. 제사는 죽은 사람을 잊지않기 위한 것이므로 제삿날에 무덤에 꽃을 갖다놓든지 가족들이 모여 망자가 다못한 과업을 이루겠다는 결의를 다지는게 좋을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다.<한기봉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