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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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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

입력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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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88여단」서 김일성 만나… 매우 허약/「동북연군」 김,일에 쫓겨 소로/「88여단」엔 김일성보다 높은 조선인있어전 북한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 중장은 지난 43년 이후 김일성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동지이며 해방 이후에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인민군을 창설했고 급기야는 비극적인 6ㆍ25전쟁을 입안,지휘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유씨는 김일성 정권의 탄생과정을 밝히고 사실보다는 왜곡과 과장으로 포장된 김일성 신화의 허구를 파헤칠 수 있는 몇 안되는 역사의 증인이다. 한국일보는 지난해 6월 전 북한인민 군부참모장 이상조 중장의 증언을 독점 발굴한데 이어 유씨의 회고담을 연재,김일성정권의 숨겨졌던 비화를 공개키로 했다. 남북고위회담ㆍ체육교류 등으로 남북관계가 그 어느때보다 화해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시점에서 이같은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유씨의 기록을 게재하기로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만이 실질적이고도 궁극적으로 남북화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유씨의 증언 제1편은 일반에게는 생소한 하바로프스크 「88 특별독립저격여단」의 비화이다.<편집자주>

김일성과의 최초의 만남은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나무토막집의 5평정도 넓이의 허름한 대대장 사무실에서 만난 김일성은 빨치산이란 느낌이 들지 않을만큼 마르고 연약한 체구였으며 비후염을 앓고 있는 탓인지 입이 항상 벌어져 있었다.

김일성은 반갑게 악수를 하면서 『동무,조선말 잘하오?』라고 물은뒤 『그렇다』고하자 『됐소,내 러시아어 통역으로 일해주시오』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나에게 조선말을 물어온 것은 내가 소련에서 나서 자란 소련한인 3세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943년 9월 내가 김일성을 처음 만난 이곳은 소련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북서쪽으로 80㎞ 가량 떨어진 브야츠크라는 산림지대안에 위치해 있던 88 특별독립저격여단 1대대장 사무실이었다.

이름도 특이한 이 부대는 소련 극동군이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전역을 넘보던 일본군의 군사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42년 7월에 창설한 비밀정찰부대였다.

부대 명칭은 여단이지만 실제로는 대대급 규모인 6백명 정도의 중국인ㆍ조선인ㆍ소련인으로 구성된 다민족부대였으며 이중 조선인은 60명선이었다.

부대편제는 후방ㆍ안전ㆍ정치ㆍ군의 등 5개 참모부산하에 4개 대대와 1개 통신대로 이루어졌으며 이밖에 중국어강습소ㆍ경리중대가 별도로 있었다. 김일성은 당시 소련군 대위계급을 갖고 1대 대장을 맡고 있었으며 휘하에는 2백명 정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부대는 사실상 소련군에 의해 운영됐지만 부대장은 중국인인 주보중 대좌였다. 주보중대좌는 김일성의 항일활동을 이야기할때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 부대에 함께 있던 조선인 동지들에 의하면 김일성은 30년대 중반부터 만주일대에서 중국 팔로군 산하의 항일 빨치산 유격대에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이름의 이 부대에는 많은 조선인이 있었으며 김일성은 중간급 간부인 제2군 6사장으로 1백명 안팎의 병력을 지휘했다. 물론 이 부대에는 김일성보다 직책이 높은 조선인들도 있었다.

바로 이 부대 사령관중 한명이 주보중이었으며 주보중은 41년 일본 토벌대에 쫓긴 김일성이 소련국경을 넘다 소련군에게 체포되자 신원보증을 해주고 김일성을 풀려나게 해준 은인이었다.

88여단은 일본군 주둔지역에 침투,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이에 맞춰 사격술ㆍ무전ㆍ낙하산훈련 등을 받았다.

훈련은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계속될만큼 고되고 엄격한 것이었다. 특히 소련군은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이들 부대원을 중국과 한국으로 보내 공산정권 수립을 주도케할 장기목적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관한 정치교육이 매우 중시됐다.

어느정도 훈련을 마치면 실제로 부대원을 만주일대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케한 경우도 많았다.

내가 이 부대에 배치된 것은 김일성을 처음만난 43년 9월로 나는 김일성의 통역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직접 정보수집활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김일성은 지금과 달리 이 당시에는 몸이 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직접 부대를 이끌고 정찰활동을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김일성의 당시 체력은 형편없어 겨울에 스키를 타고 야외훈련을 나간적이 있는데 힘이 부쳐 다른 대원의 허리에 밧줄을 매고 이동했던 사실을 이야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두뇌가 뛰어나고 지도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소련인들의 눈에 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은 러시아어는 능숙하지 않았지만 오랜기간 만주에서 활동했던 탓으로 중국어는 뛰어난 편이었다.

88여단의 간부중에는 김일성외에도 김책(대대정치위원) 최용건(여단정치지도원) 강건(제4대대장ㆍ강성산 전 정무원총리의 아버지) 이동화(여단군의관) 등이 있었으며 이들의 직위는 김일성보다 다소 높거나 비슷했다.

이들의 이름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당시 88여단에 있었던 조선인들은 해방후 북한에서 김일성을 도와 정권수립에 1등공신이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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