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보천보 전투활약」은 사실/북한 지나치게 과장ㆍ선전/다툰사람엔 반드시 보복/김정숙과 부대서 생활… 음식솜씨 좋아/당시 김정일 돌지나… “백두산출생” 왜곡서울에 들어온지 3일만인 지난달 18일 나는 TV에서 강영훈총리와 회담하는 김일성의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다. 31년만에 다시본 김일성은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할 만큼 달라져 있었다.
그는 비만하다고 느낄 만큼 풍채가 좋아져 있었다. 나보다 5살이나 많았지만 비교적 건강해 보였고 목소리도 옛날보다 굵어진 것 같았다.
그의 건장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련에 돌아온 직후 3차례나 풍을 맞아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첫회에도 말했듯이 하바로프스크 88여단 시절 김일성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마르고 허약해 있었다.
그것은 아마 김일성이 만주를 떠돌며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할 때 극도로 열악한 환경속에서 생활한 탓으로 몸이 많이 상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모로만 본다면 최용건이나 최현이 더 빨치산 용장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부대를 이끌고 직접 정찰활동을 나가는 일이 딱 한번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언젠가 한 겨울에 스키를 타고 야외훈련을 했을 때는 김일성이 계속 대열에서 뒤처지자 1중대장 최용진의 몸에 끈을 묶어 이동한 적도 있었다.
이런 점들로 인해 나는 김일성에 대해 특별히 강한 인상을 받을 수 없었다.
또 88여단에서는 일본군과 실전을 벌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으로서 김일성의 자질을 체험할 기회도 없었다.
군사 전술면에서는 김일성 보다 4대대장 강건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한가지 김일성의 자질을 엿볼 수 있었던 일은 빨치산 출신들에게 들은 보천보전투에 있어서 김일성의 활약상이다.
김일성은 항일빨치산을 하던 37년 6월4일 최현을 비롯한 2백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국경마을 보천보를 습격,일경 수명을 살해하고 지주들에게 식량과 자금을 거둔 뒤 퇴각했다.
이 단발적 전투는 현재 북한에서 수십 수백배 과장돼 김일성의 가장 화려한 항일투쟁경력으로 선전되고 있다고 한다.
이때 퇴각하던 김일성은 산으로 달아나지 않고 일본 군복차림으로 일본군가를 부르면서 당당히 대로로 행진토록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 역사서적은 당시 김일성이 주민들을 모아 놓고 애국적 연설을 했다고 자랑하는데 6ㆍ25전쟁중 우연히 나와 만나 보천보 얘기를 했던 최현은 『야,도망가기도 바빴는데 무슨 대중연설을 해』라고 내뱉었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와 역사왜곡은 내가 북한에 있을때 이미 시작됐지만 지금처럼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5년전 나는 타슈켄트에서 「력사」라는 북한서적을 보고 조선역사에 관한 것으로 알고 2루블을 주고 사서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은 김일성의 항일운동만을 다룬 책으로 나는 앞부분을 보다가 책을 덮어버렸다. 너무나도 왜곡과 과장이 심해 역겨워서 더이상 볼 수 없었다.
나는 이 책을 폐품으로 반납하고 소련 소설책 한권과 바꿔 버렸다.
이 책은 김일성을 독립투쟁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며 한없이 인자한 지도자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88여단에서 김일성의 인자로운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여단장 주보중이나 소련인 장교들에게는 순종적이고 다정다감했었지만 부하들에게는 엄격하고 차가웠다.
특히 김일성은 자신과 좋지않은 일이 있었던 사람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뒤에 반드시 보복을 하는 옹졸한 면이 있었다. 후에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사람들중 상당수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먼 옛날에 있었던 김일성과의 불화 때문에 화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경우도 그러한 예중 하나다. 88여단 시절 어느날 나는 부대 규정에 따라 점심식사를 마친 뒤 나른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이때 김일성 대대장의 연락군관이 나를 깨워 급식부로 가서 김일성이 먹을 연어를 타오라고 했다. 우리 부대는 규율은 엄격했지만 병사들의 인격을 존중ㆍ장교라도 개인적인 심부름을 부하에게 시키지는 않았다. 때문에 나는 이 심부름을 거부했다.
또 한번은 여단본부에서 당직을 서고 있을 때 중대장 최용진이 『유가이(소련출신들은 성밑에 가를 뜻하는 북한말인 가이를 붙여 불렀다. 유명한 허가이도 허씨라는 뜻이다) 김일성 대위에게 내일 아침 회의장소가 변경됐다고 연락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회의장소가 어디로 변경됐느냐』고 되물었으나 최는 『그런 것은 알 필요 없다』고 짜증을 냈다.
할 수 없이 김일성에게 가 회의장소 변경사실을 보고하자 김일성은 변경된 장소를 물었다. 나는 전후사정을 설명했으나 김일성은 『무슨 심부름을 그따위로 하느냐』며 화를 냈다.
나 역시 기분이 나빠 『중대장이 안가르쳐 주는 것을 어떻게 하겠소. 내가 뭘 잘못했소』라고 반박하며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나는 이 하찮은 두 사건을 금세 잊어버렸지만 김일성은 이 일을 두고두고 되새기고 있었음을 후에 알게됐다.
김일성의 부관을 지내다 버림을 받고 소련으로 쫓겨났다고 앞서 설명했던 문일은 귀국직전에 나를 만나 김일성이 당시 일 때문에 나에 대해 나쁜감정을 갖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문일은 또 88연단 통신대 소대장이었던 박길남(6ㆍ25 당시 공병국장)도 그의 부인이 김일성의 군복을 줄여달라는 부탁을 거절,김일성의 미움을 사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문일의 경고는 그뒤 우리 두사람도 숙청을 당함으로써 사실로 입증됐다.
나는 이같은 사례를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내가 88여단에 도착했을 때 김일성은 소련으로 건너와 결혼한 김정숙과 부대안의 장교관사에서 살고 있었다.
김일성과 같은 빨치산 출신인 김정숙은 88여단에서는 김일성의 뒷바라지만 했는데 음식솜씨가 좋았고 인심도 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정일(소련명ㆍ유라)은 한돌 반으로 한창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고 44년 차남 평일(소련명ㆍ슈라)이 또 태어났다.
그런데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해보니 백두산에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초가집이 세워져 있고 정일봉이란 바위도 있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내 소련 친구중 해방후 북한에서 소련 통역으로 일했던 김창국이란 사람이 있다. 이 친구는 올해초 사망했는데 그의 부인은 김일성의 5촌 조카의 고모로 나보다 잠시 앞서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5촌 조카를 만나 『내가 김정일이 브야츠크에서 태어나 자란 것을 아는데 무슨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하느냐』고 질책을 하자 조카는 낮은 목소리로 『고모,우리도 알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도대체 김정일의 탄생지를 백두산으로 왜곡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88여단에서 김일성에 대한 나의 추억은 별로 유쾌한 것이 못되지만 그 시기는 내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뜻깊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차 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 조선인들은 자신의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이같은 민족의식을 공유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
우리는 새벽 6시에 기상,밤 10시에 취침할 때까지 꽉 짜여진 훈련일정에 따라 바쁜 생활을 했다. 훈련중에는 5분씩 밖에 휴식시간이 없을 만큼 훈련은 고된 편이었다.
훈련내용은 사격ㆍ행군ㆍ체육ㆍ제식ㆍ소부대교육 등이 주종이었고 낙하산 강하훈련까지 받기도 했다.
훈련은 대체로 소부대 단위로 진행됐고 여단 합동훈련 때에는 소련 극동군 사령부에서 지휘관이 나와 직접 감독을 했다.
여단장 주보중 대좌는 오랜 항일 빨치산 경력으로 군사전술면에서 매우 뛰어났고 성격도 인자해 부대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주여단장은 장교들을 모아놓고 적과의 가상대치 상황을 설명한 뒤 각 장교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을 말해보라고 하며 그 작전을 일일이 평가해 주곤 했다.
고된 훈련 속에서도 여름에는 부대 인근의 아무르강으로 나가 연어를 잡으며 어린이처럼 즐거워하던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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