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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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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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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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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함께 해방한달후 원산에/목단강 동포들 환영성대/압록철교폭파… 귀로바꿔/추석전날 도착… 김일성 “내 신상 함구”에/최용진 “헛소리 하고 있구만” 혼자말 불평나와 김일성의 하바로프스크 88여단 생활은 45년 8월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끝나게 된다. 우리는 일본군과 본격적인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한채 소련에 의지하여 조국해방을 맞게된 것이다.

45년 5월 대독일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그 힘을 극동으로 돌려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만주ㆍ조선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소련 극동군은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한 일본군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고 8월초 청진ㆍ원산 등에 상륙했으며 마침내 일본이 항복하자 북한 전역을 장악했다.

우리는 88여단에서 조국해방 전투소식을 들으며 우리도 하루빨리 전투에 투입되기를 갈망했으나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채 해방을 맞고 말았다.

일본이 항복한 직후 우리부대에는 해체명령이 내려왔고 우리는 무장을 해제,모든 무기를 상급기관에 반납했다.

나의 88여단 생활은 정확히 3년만에 이렇게 끝났으며 김일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국지도자 생각못해

그런데 북한 역사는 41년부터 시작된 김일성의 88여단 행적을 가능하면 은폐하려하고 있다. 위대한 주체사상의 창시자가 소련군의 일개 간부로 타지에서 무기력하게 해방을 맞았다고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역사는 김일성의 소련생활을 대체로 얼버무리고 지나간뒤 해방당시에는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소련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북한에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김일성은 일본이 항복하고도 한달이 지난 9월중순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나와 함께 북한에 들어 갔다.

88여단이 해체된뒤 중국인은 주보중 여단장의 인솔로 중국으로 귀환하고 조선인 60여명은 북한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인 인솔책임자는 소련 극동군 정찰본부 소속 사이체트 소좌였으나 실제로는 김일성이 처음부터 인솔을 지휘했다.

당시 소련군이 우리를 북한에서 어떤식으로 이용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까지만도 우리들중 김일성이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하바로프스크를 떠날때 장교들에게는 북한에서 맡을 임시직책이 부여됐는데 김일성의 직책은 평양 경무장(헌병대장)이었다. 이 직책부여는 장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기 위한 의미가 강했고 때문에 그대로 시행되지도 않았지만 소련군의 당시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벅찬 감격과 설렘을 안고 해방된 조국을 향해 출발했다.

처음 우리의 이동코스는 목단강ㆍ만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은뒤 신의주로 진입하도록 계획돼 있었다.

○김 초라한 귀국 감추려

목단강에 이르자 부근마을에 사는 조선인들이 소련군복을 입은 우리들을 보고 뜨겁게 맞아 주던 일이 기억난다. 이들은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소를 잡는등 3일간 우리들을 성대하게 대접해 주었다.

3일간의 환대를 받은뒤 우리일행은 압록강으로 떠날 준비를 했으나 소식을 들어보니 압록강 철교가 폭파된 상태여서 하는 수 없이 육로입국을 포기하고 선박을 이용하기 위해 우스리코스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또다시 이동했다.

몇걸음밖에 남지않은 조국땅을 두고도 다시 만주로 발걸음을 돌리던 이때 우리들의 심정은 마치 조국해방이 좌절된 것 같은 안타까움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우리일행은 소련군함 부가초프호편으로 9월19일 상오 그리던 조국땅 원산항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이날짜를 지금도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 다음날이 음력으로 추석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당시 압록강을 건너 빨치산 활동을 펼치며 귀국한 것으로 왜곡선전되고 있었다.

우리는 원산항 부근에 있는 국수집2층을 숙소로 정하고 조국에서 첫식사로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뒤 소련대위계급장을 달고 있던 김일성은 우리들에게 세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 첫째는 내일이 추석이니 밖에 나가더라도 술을 많이 마시지 말고 조용히 지낼 것,둘째는 누가 묻더라도 우리는 선발대이며 김일성은 나중에 올 예정이라고 대답할 것,셋째 김일성의 나이ㆍ출신지ㆍ경력 등 신상에 관해서는 일체 모른다고 할 것 등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 김일성이 왜 이같은 지시를 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본래 야심이 많았던 김일성은 이때 벌써 자신이 지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개인 우상화를 준비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그 당시 북한주민들사이에서 김일성의 만주 항일투쟁에 관해 많은 소문이 퍼져 있었고 김일성은 이를 의식,자신의 초라한 귀국을 감추려했던 것 같다.

○기차충돌… 죽을 뻔

나는 최근 소련에서 생활할때 남한에서 김일성이 가짜라든지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독립투사가 여러명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며 이번 남한 방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같은 학술적 논쟁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점은 현재 북한주석 김일성이 30년대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중간지휘관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고 하바로프스크에서 나와 같이 88여단에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뒤에 다시한번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해방당시 북한주민들은 김일성의 귀국소문을 전해듣는 과정에서 사실이상으로 그를 영웅시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특히 중요한 사실은 이로인해 그가 상당히 나이를 먹은 노장군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같은 여론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자신에 대해 일체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것 같다.

김일성이 이 명령을 내리자 성격이 괄괄했던 최용진은 밖으로 나오면서 혼자 중국말로 『헛소리 하고 있구만』이라고 중얼대며 불만을 나타냈다.

아무튼 추석 다음날까지 3일간 우리는 원산에서 머물렀다. 추석날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씨름도 구경하고 한가위 음식도 사먹으면서 모처럼 한가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소련은 북한 전지역을 완전히 장악,군정을 펴고 있었고 군정사령관은 소련극동군 제25군사령관인 치스차코프대장이었다.

독소전쟁에 참가,명성을 떨쳤던 치스차코프대장은 김일성을 마중하기 위해 평양에서 기차편으로 원산에 올 예정이었다. 소련군이 김일성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입증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약속날짜인 9월21일이 되어도 치스차코프대장이 오지않아 우리는 기차편을 마련해 이날 하오 1시께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일행과 치스차코프대장은 아슬아슬하게 생명의 고비를 넘긴 숨은 일화가 있다.

우리가 탄 기차가 원산역을 빠져나와 한 산모퉁이를 도는 순간 같은 선로 반대편에서 마주오던 열차와 정면충돌한 것이다. 이 열차는 다름아닌 치스차코프대장이 탄 열차였다.

하지만 산모퉁이여서 열차가 속력을 줄이던 상태였고 두열차 기관사가 신속히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탓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새임무 받고 헤어져

화가 난 치스차코프의 부관은 사고책임을 물어 우리 열차의 기관사를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다. 나는 지금도 자신은 아무죄도 없으니 살려달라고 무릎꿇고 애원하던 기관사의 모습이 선하다.

김일성은 기관사 처형을 막지 않았다.

남한에서도 그렇겠지만 이 시기에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말과 행동이 곧 법이었다. 소련군정 초기에는 소련병사의 행패가 잦아 문제가 되곤 했다.

열차사고로 인해 우리일행은 다음날인 9월22일에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우리는 소련군이 관장하는 평안남도 경비사령부에 거처를 정했다. 며칠전까지만도 악명 높은 일본헌병대사령부였던 곳이다.

며칠뒤 우리들은 각자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고 뿔뿔이 흩어지게 됐으며 이때부터 우리의 운명도 전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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