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고당 포섭자리에 나도 동석”/김,88여단 동료 통역ㆍ치안 배치/소군 눈ㆍ귀 장악 박헌영도 제쳐/평양 기생 구해 소 장군에 향응공세/“고당 따님과 결혼” 비서가 내게 권유북한에 귀환한 김일성은 소련 군정하에서 북한의 새 지도자로 선택될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김일성 자신도 그 조건들을 십분활용하여 치밀하게 권력장악을 준비했다.
해방후 북한은 소련 극동군 점령하에 있었으며 제25군이 군정업무를 실무 관장했다.
이때 소련 극동군의 수뇌부는 사령관 마실리예프 원수,정치위원 슈티코프 중장이었으며 25군은 사령관 치스차코프대장,참모장 샤닌 중장,정치위원 레베데프소장,군정장관 로마넨코 소장 등으로 짜여져 있었다.
25군은 실무행정을 대령급 장교들이 맡도록 했는데 가장 중요한 민간행정 담당자는 이그나체프 대령이었다. 평양과 각 도 단위 지역에는 소련 주둔군 경비사령부가 설치됐고 역시 대령급이 사령관을 맡았다.
이들 소수 소련군 장교들이 오늘의 김일성 정권을 탄생시킨 장본인들이었다.
특히 치스차코프 25군사령관,레베데프 정치위원,로마넨코 군정장관,이그나체프 대령 등 4명의 역할은 실로 막중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평양 도착후 별다른 직책이 없이 소련군 장성들과의 교제에 주력하면서도 군정업무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를 비롯한 나머지 88여단 일행들에게는 새로운 직책이 부여됐는데 이때 우리들에게 배분된 직책을 주의깊게 음미해 볼만하다.
○일부는 김일성 호위병
우선 소련 출신인 나는 평안남도 경비사령관 무르진 대령의 통역으로 임명됐으며 문일은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박길남은 레베데프 소장 통역으로 각각 선발됐다. 빨치산 출신들은 오진우가 평양시 보안서장,최용건은 임시인민위 보안국장 등 주로 치안책임자로 임명되고 일부는 김일성의 호위병으로 남았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은 심복들을 소련인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통역으로 박아놓고 한편으로 치안조직을 장악함으로써 권력도전에서 쉽게 경쟁자들을 제칠 수 있었다. 그는 중요한 책임자 자리에 심복을 배치하지 못할 때에는 부책임자로라도 심어 놓았다.
나는 통역일을 하면서 소련군의 비밀전문ㆍ중요문서 등을 접할 기회가 많았으며 이를 통해 북한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소련군의 평가를 알 수 있었다.
잘 알려진대로 소련군은 처음엔 북한지도자로 민족주의자인 고당 조만식선생을 내세우려고 했었다.
나는 평안남도 경비사령부 정치담당 부사령관이었던 브고르카 중령의 통역으로도 잠시 일하면서 브고르카 중령이 조만식선생을 만나는 자리에 3번이나 동행했었다.
그러나 조만식선생은 소련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소련군정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그뒤에도 소련군은 여러 사람을 통해 조만식선생을 포섭하려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그는 일찌감치 소련의 관심권에서 제외됐다.
다음으로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이 물망에 올랐다. 지식인 출신이면서도 화려한 투쟁경력을 지니고 있는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공사를 지낸 샤브닌에 의해 모스크바로 천거됐으며 남북한에 탄탄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다.
○변절소문에 관심 줄어
하나 소련 군정 당국은 그가 서울에 공산당 본부를 둘 것을 주장했고 또 일제하에서 지하활동을 할 때 일시 변절했다는 소문도 있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만주에서 활동했던 김두봉 무정등의 이른바 연정파들도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지만 중국의 영향력을 우려한 소련군정의 견제로 권력에서 소외됐다.
연안파가 45년 10월 무장병력을 이끌고 귀국할 때 소련이 이들을 무장해제 시킨뒤 입국케한 일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
또 하나의 세력은 해방 이후 소련 군정 업무를 돕기위해 소련에서 입국한 허가이 등 소련파이다.
그러나 이들은 통역ㆍ행정요원으로 개별적으로 입국,종적ㆍ횡적 연대가 없었기 때문에 대권에 도전할 처지가 못됐다.
자연히 소련의 최종선택은 그들이 잘알고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김일성 집단으로 기울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만나본 조만식ㆍ김두봉ㆍ무정ㆍ허가이ㆍ박헌영 등은 경력이나 능력면에서 아무래도 김일성 보다는 나아 보였다.
특히 조만식선생은 인품이 너그러우면서도 자기주관이 분명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인품 좋고 주관 뚜렷해
내가 조만식선생을 만나러 다닐 때 그의 비서는 나를 좋게봤는지 『총각이면 고당선생 따님과 결혼하라』고 권유한 일도 있었다.
허가이는 타슈켄트에서 지역당 비서를 지낸 거물로 나의 형 유성훈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허가이는 술을 좋아해 역시 술을 즐기는 김일성과 밤새껏 대작하는 일이 많았는데 나중에 꼭 술주정을 하는 나쁜습관이 있었다. 박헌영은 쾌활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대인관계가 좋고 언변도 뛰어났다.
무정은 전형적인 무인스타일로 성격이 호방했으나 고압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 결정적 시기에 소련 장성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기억된다.
김일성은 치스차코프 사령관,슈티코프 중장,레베데프 소장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자주 주연을 베풀었다.
이같은 향응공세와 함께 가담한 사람이 88여단에서 의무소장을 지냈고 해방후에는 북조선 노동당 조직부장이었던 이동화였다.
88여단 당시 계급인 소좌를 따서 「마이요르ㆍ리」라고 불렀던 그는 가끔 나에게도 술자리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당시 평양의 대동강변에는 비밀리에 기생집이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동화는 이 평양기생이나 해방후 잔류한 일본 여성들을 구해 김일성과 소련 장성들간의 술자리에 시중을 들게했다.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에 힘입어 김일성은 북한지도자로 낙점을 받게됐으며 이같은 사실을 공식화한 계기가 45년 10월14일 지금의 모란봉경기장인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개선 환영대회」였다.
○열광적 인기에 놀라
하오 1시 양복차림에 가슴에는 소련군 훈장을 단 김일성이 연단에 나타나자 군중들은 운동장이 떠나갈듯이 「김일성 장군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10분간 대중연설을 했는데 사실 그 연설문은 25군 정치부에서 작성하고 시인 전동혁(소련파로 군정사령부의 조선어신문 발행에 관계)이 번역한 것이었다. 이날 집회에 참석했던 나는 김일성의 인기를 보고 내심 크게 놀랐으며 그를 다시한번 쳐다보게 됐다.
그러나 김일성의 연설이 계속되면서 군중들 사이에 「가짜 김일성」이란 쑤군거림이 들렸고 심지어 「로스께 앞잡이」라고 욕설을 하며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중들의 동요는 내가 지난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연단의 김일성이 자신들이 생각해 왔던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워낙 오래전부터 「김일성 장군」의 전설적 투쟁을 들어왔기 때문에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정도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몸도 지금처럼 건장하지 않았고 짧은머리 탓인지 33세의 실제나이보다도 더욱 어려보이는 새파란 청년모습이었다. 나는 내옆에 있던 한 여인이 『저거 아이아냐. 무슨 김일성 장군이 저래』라고 말하는 것도 직접 들었다.
○“저거 아이아냐” 실망
김일성에 이어 조만식선생이 머리에 흰수건을 동여매고 흰두루마기 한복차림으로 등단,40여분간에 걸쳐 연설을 했다. 김일성에 실망한 탓인지 이 연설에 대한 반응도 냉랭했다.
소련군 25군사령부는 대회를 마친 뒤 자체적으로 여론을 수집해본 결과 가짜 김일성이라는 부정적 반응이 많자 적잖이 당황했다.
이에 따라 그뒤 소련군은 무엇보다 김일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선전활동에 치중했으며 나는 이것이 김일성 우상화의 뿌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번은 소련군이 김일성의 고향이라는 만경대에 북한지도급 인사들을 초청,연회를 베풀고 김일성이 진짜임을 역설한 적도 있었으나 참석자들은 선뜻 수긍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김일성은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북한의 실권자가 된다.
그러나 김일성이 완전한 지도자의 지위를 굳힌 것은 민족적 비극인 6ㆍ25를 도발하고 수많은 그의 동지들을 무참히 숙청한 뒤이다.□공동집필 최평길 교수(연세대)
「유성칠 나의증언」은 이번 6회부터 유성칠씨와 최평길 교수(연세대ㆍ북한군사 관계 전공)가 공동집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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