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참전 후 김일성 주도권 상실/인민군은 조공역만 수행/극비이동… 미,뒤늦게 알아/협상고지 노려 일진일퇴… 정전회담 2년/전쟁책임 김에… “북진통일”편 이승만도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이라는 낭보를 갖고 내가 북한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평양은 국방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나와 박헌영은 평남 덕천에 피신해 있는 김일성을 찾아가 중국 방문 결과를 보고 했다. 김일성은 내 손을 잡으며 『유성철동무 고맙구만』이라고 반가워 했다.
김일성은 이날 우리 뒤를 이어 도착한 조중 연합군사령관 팽덕회를 만나 장시간 반격전략을 논의했다.
김일성은 모택동의 천거에 따라 연안파인 내무상 박일우를 조중 연합군 부사령관에 임명했다. 박일우는 모택동과 함께 대장성에 참여한 경력 때문에 모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박일우는 후일 6ㆍ25전쟁중 중국식 군사전략을 고집하며 분파주의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했다.
중국 지원군의 참전으로 김일성은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중국 지원군은 주공으로 중부전선을 담당했으며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인민군은 조공으로 전락,동부전선을 맡았다.
중국 지원군은 10월19일부터 참전했으나 워낙 은밀히 이동했기 때문에 미국이 중국참전 사실을 안 것은 10월말이라고 한다.
중국 지원군의 군사전술은 매우 독특했다.
그들은 북한으로 이동하면서 미군 비행기의 관측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만 산악을 통해 행군했으며 낮에는 참호속에서 잠을 잤다. 실전에서도 그들은 적을 깊숙이 끌어들인 다음 전후방에서 동시에 피리ㆍ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며 공격했다. 또 밀집대형을 유지하며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어 인해전술이란 말을 낳기도 했다.
인민군도 만주에서 인민군 패잔병과 조선족 동포들을 모아 3개군단을 새로이 편성해 전력이 크게 강화됐다.
중국 지원군은 10월25일께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해 있던 국방군의 퇴로를 차단,공격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담했다.
중국 지원군의 참전 사실을 알고 크게 당황한 국방군과 미군은 청천강 유역까지 멀찍이 물러났으며 인민군과 중국 지원군은 계속 밀고 내려가 12월6일 평양을 탈환했다.
평양을 되찾고 전세가 다시 북한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자 김일성은 12월21일 자강도(평안북도 북부) 강계에서 노동당 중앙위 제3차 전체회의를 열었다. 6ㆍ25개전 이후 처음 열린 이 회의는 6개월간의 전쟁상황을 평가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김일성은 장시간에 걸친 연설을 통해 당과 인민군 간부들의 과오를 신랄히 비난했다.
김일성의 연설문은 당중앙위 부위원장 김창만이 작성한 것이다. 김창만은 연안파로 조선독립동맹 간부로 있다가 북한에 돌아와 당 중앙위 선전부장을 거쳐 부위원장이된 인물로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이런 김창만이 인민군 총참모부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제멋대로 전쟁을 평가하는 연설문을 작성한 것이다.
김일성은 이 연설에서 『전쟁을 통하여 충성스러운 당원과 그렇지 못한 당원이 드러났다. 충성스럽지 못한 당원은 당내 지위에 관계없이 엄단해야 한다』고 숙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첫번째 희생자는 인민군 문화훈련국장 김일이었다. 김일성은 이날 회의에 앞서 김책 전선사령관(동부지역 사령관 겸임)과 나를 배석시킨 가운데 김일을 소환,그가 전쟁중 비행기가 없어 전투수행이 어렵다는 말을 한 사실을 심문했다. 김일은 아무말 없이 그 사실을 시인했다. 이에 따라 김일은 이날 회의에서 호된 비판을 받고 현직을 박탈당했다. 김일 외에도 빨치산 출신인 최광,임춘추 등이 직위해제됐으며 연안파인 무형,남로당 출신의 허성택 등도 김일성에게 심한 책임 추궁을 받았다.
평양 방위에 실패했고 전쟁중 부하군관을 임의로 총살한 일등으로 이미 제2보조지휘소 사령관직을 박탈당했던 무형은 이날 회의로 영원히 매장됐다.
이러는 동안 전쟁은 새로운 해를 맞게 됐다. 인민군과 중국군은 51년 1월4일 서울을 재점령하고 그해 4월경까지는 우세한 상황에서 계속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미군과 국방군의 재반격이 시작되면서 전황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져 들었다. 서울과 현재의 휴전선 일대를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지루한 공방전이 반복됐다. 그 어느쪽도 최후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가 쌍방에 휴전을 제의,그해 7월10일부터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시작됐다.
이 정전회담에 남일 총참모장이 북한측 수석대표로 참석하면서 나는 다시 총참모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정전회담이 시작된 뒤에도 양측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더욱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미군과 국방군은 수차에 걸친 춘계ㆍ추계 공세를 강행했다.
정전회담이 장기화된 것은 북한측이 과거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고 주장한 반면 미군측은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 정전협정의 실질적인 주역인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바랐던 반면 남북한은 아무런 결실도 없는 상태에서의 종전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노골적으로 휴전을 반대하며 국민들을 선동,휴전반대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나는 김일성이 정전협정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다지 내켜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김일성은 종전을 하더라도 일단 서울을 손에 넣은 뒤 하자고 주장했으나 팽덕회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휴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한 종전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53년 7월23일 마침내 종전협정이 체결되고 3년간에 걸친 전쟁은 막을 내렸다.
나는 6ㆍ25를 회고하면서 『도대체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은 한국인과 외국인을 통틀어 4백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 3년전쟁을 치르면서 한반도는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전쟁 결과로 달라진 것은 몇㎞ 안되는 군사분계선일 뿐이다.
6ㆍ25가 한반도에 끼친 해악은 물리적 피해보다는 남북한간에 치유하기 어려운 적대감을 심어 민족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요원하게 만든 것이다. 또 전쟁결과로 한반도 문제는 더욱 외세에 의존하게 됐다.
국제적으로도 6ㆍ25는 동서 냉전을 촉발시키고 각 국가가 국민의 복지보다는 군사력 증강에 소중한 자원을 낭비케 했다.
이런 역사적 죄악에 대한 책임은 전쟁을 도발한 김일성 자신이 져야 한다. 그는 한반도 전체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에 사로잡혀 무모하게 이 비극적 전쟁을 자행했다. 설사 김일성이 조국통일이라는 순수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이 끝난 뒤 수많은 북한 지도자들을 숙청ㆍ살해하고 북한을 그의 개인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 숙청당한 김두봉ㆍ허가이ㆍ박일우 등은 북한 입장에서는 모두 김일성보다 뛰어난 투쟁경력과 역량을 지닌 혁명가이자 애국자였다.
그리고 나는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도 전쟁 책임의 일단을 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노골적으로 북진통일을 외쳐 북한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마침내는 남침의 구실을 제공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 전쟁을 계획한 나 자신도 당연히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전쟁으로 희생당하거나 이산의 고통을 겪게된 많은 분들에게 무릎꿇고 용서를 빌고 싶다. 이번에 남한에 들어와서 만난 어떤분의 말처럼 나는 서울 거리에서 온전히 다닐 수도 없는 죄인임이 분명하다. 나는 얼마남지 않은 생애동안 내가 저지른 반민족적 범죄행위를 진심으로 참회하며 살 생각이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공동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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