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 기민한 술수 경계를”/「6·25」실상도 샅샅이 밝혀/초기정권 성격·반대파 제거 규명 큰 성과/김 살아있는한 감상적 대북접근엔 한계지난 11월1일부터 독자들의 지대한 관심과 호응속에 연재돼온 전북한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씨의 「나의 증언」이 11월30일자 19회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김일성 정권의 탄생과정과 6·25전쟁의 내막을 생생히 밝혀준 유씨의 증언을 마감하면서 이번 연재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이번 증언을 공동집필한 연세대 최평길교수(북한정치행정)의 기고를 통해 평가해 본다.<편집자주>편집자주>
북한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은 최근 우리 민족의 최대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통일을 위해서도 반드시 선행되어야할 중요한 작업이다.
이같은 북한 바로알기 작업은 북한의 오늘의 실상 못지않게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임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일보를 통해 그동안 연재돼온 유성철씨의 증언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 수립과정에 숨겨졌던 수많은 비밀들을 파헤쳐냄으로써 오늘의 북한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한 실로 귀중한 역사발굴 작업이었다.
이 증언의 최대수확은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운동을 한 공식기록이 있는 것외에는 1945년에 그가 평양에 소련군과 함께 나타나기까지 40년대 초반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가 밝혀지지 않고 있었는데 그 행적이 최초로 소상히 밝혀진 것이다. 아울러 평양입성 후 수많은 공산지도자와 계파가운데 유독 김일성만이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배경,그리고 각 계파를 이간·거세한 그의 독특한 집권과정,그 과정을 통해 장악한 김일성의 초기정권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규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6·25전쟁의 실상,전쟁동기,작전개념,전쟁관리 등이 전쟁실무자에 의해 확인된 것도 커다란 수확이었다. 한편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일제시대부터 소련은 조선반도에 정보원을 잠입시켜 일본의 식민지 통치,군사이동,국내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그리고 소련 군사고문단이 인민군 중대단위까지 배치돼 조정감독을 한 사실 등이다. 그리고 중국이 6·25 개전 초기부터 소상히 전황을 체크하고 있었다는 점도 새롭게 알려졌다.
이런 사실들을 다시 정리하면 김일성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인물이며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의 남북한 관계는 과거의 집권술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접근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민족적 차원의 단순 감상논리로 북한과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소련이 비록 탈냉전 시기의 태평양 동북아시아 경제권에 동참한다 해도 그들의 매서운 보이지 않는 전통적 정보 수집,한반도에서의 감시를 깊이 되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김일성은 1912년 4월15일 평남 대동군 하리 칠골에서 출생하여 숭실중학을 졸업한 뒤 모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한의사 일도 한 아버지 김형직과 기독교 집사였던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서 3남1녀의 장남으로 처음 이름은 김성주이다. 그의 동생으로 이미 고인이 된 김철주,과거 노동당 조직부장으로 남북조절위원회 북측대표였던 김영주,그리고 여동생이 있다.
김영주는 김일성이 『너만이라도 혈통을 이으라』고 해서 게릴라부대에서 이탈하여 중국에서 일본인 상점 점원노릇을 했다고도 한다. 이번 유씨 증언에는 김영주가 하와이에서 40년대 초반을 보내고 해방 후 귀국,인천과 서울을 거쳐 평양에 귀국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김일성은 만주로 건너가 1926년 15세때 3년제 초급중학인 길림의 육문중학에 입학하여 졸업을 며칠 앞두고 조선공산청년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자 학교를 그만두고 19세부터 빨치산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후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 이후 노령에서 조직된 여러 한인 공산당조직중 규모가 비교적 큰 이동휘의 고려공산당 휘하의 공산청년총동맹과 연계된 만주 길림성 조선공산당 청년회에 관여했다.
그러나 소련공산당이 일국일당 원칙에 의해 독립국가가 아닌 조선공산당을 인정치 않자,김일성은 개인 자격으로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동북항일연군의 6사장으로 조선인 병력 2백여명을 지휘하는 부대장이 됐으며 1940년 일본 관동군의 대토벌에 밀려 소련땅 하바로프스크 부근 브야츠크로 간 것이다.
이상은 일본 경찰외경사 자료집,중국 공산당중앙위원회 자료집,그리고 중국 공산당 간부로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긴밀한 협조체제로 일하던 주보중,장수천 등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 것이며 학계에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김일성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는데 이번 유성철 증언을 통해 그의 나이 29세였던 40년부터 45년까지 김일성이 소련 극동군구사령부 직속 88독립특별저격여단의 1대대장으로 활약했으며 장차 북한에서 공산당 지도자가 되는 수련을 받은 것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김일성은 게릴라,정규전투 훈련 또는 전문 직업군인이기 보다는 그의 성격,체력면에서 정치군인이었고 조직사업에 보다 관심 있는 인물이란 점이 유씨 증언에서 드러났다.
소련군을 따라 1945년 9월21일 원산에 상륙,한달 후인 10월14일 평양 시민환영대회에서 명실상부한 집권자로 부상할 때까지 김일성은 주로 소련 점령군 고위층과 긴밀히 협력,때로는 향연을 베풀면서 정치상황에 복잡한 논리로 대응하는 남로당 박헌영 연안파 김두봉 또는 소련파 허가이에 비해 군대전우의 단순 충성논리로 소련 점령군에 협조했다.
따라서 보다 통제하기 쉬운 김일성을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대권주자로 점찍어 스탈린의 오른팔인 즈다노브 정치국원에게 직접 연결시켜 어렵지 않게 북한지도자로 옹립한 것이다.
만주 항일빨치산과 하바로프스크 88여단에서 같이 근무한 25명 정도의 김일성 직계 빨치산은 김일성이 소련군 비호속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한 전위 세력이었다. 이들은 안길 서철 임춘추 이동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학,국민학교 중퇴 정도로 김일성과는 이념적 갈등이 있을 수 없고 도전세력이 될 수 없으며 흩어지면 생존 불가능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김일성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행동집단이 됐다. 그들은 정권장악 후에도 당,안전기관,군대에서 반대파를 암살하는 폭력집단으로 행세했다. 결국 김일성 정권은 소련군의 지원과 그의 소수 빨치산 부하의 테러와 감시,그리고 적시에 반대파를 제거하는 기민한 술책발휘로 이루어진 원천적 군사정부 성격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방조속에 이들 빨치산 요원을 동원,전쟁전에는 조만식,전쟁중에는 박헌영,전행 후 50년대 중반기에는 연안파,60년대 초에는 소련파를 상호이간,개인별로는 파격적 승진과 보직으로 환심을 사고 방심하는 순간 전격적으로 숙청,제거하는 기민한 정치술수를 과시했다.
따라서 금후의 남북교류·각종 회담·통일에의 접근에서 북한 김일성의 거세술과 실무정치세력을 예의 주시해 볼 필요가 있으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북한정권에 대한 순수한 민족차원의 인간적 정의,인도주의나 정상적 절차에 의존하는 남북관계 접근에는 한계가 있고 예측불허의 변칙적 실물정치 접근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유씨 증언은 소련과 중국이 과거 한반도에 보여온 깊은 관심과 개입과정을 알 수 있게 했다. 유성철씨가 소련 최고사령부 직속 정찰학교 장교로 임관,1943년 여름 원산으로 침투,조선에서 암약하고 있던 소련인·한인 정보원과 접선하여 첩보자료를 입수,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사령부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대목이나 30,40년대에 소련이 서울주재 소련공사,기타 수면하에서 활동한 많은 정보원을 두고 있었던 점은 오늘같은 한소관계나 극동의 정세에서도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소련은 군사고문단을 북한군 중대단위까지 파견,조정통제했는데 초창기 최고정치 고문 역할은 극동군 사령부 정치위원 스티코프 중장과 평양 점령군 25군의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이었다.
그러다가 인민군이 창설되고 6·25전쟁이 터지자 이들은 본격적인 군사고문단 활동을 전개했는데 초대 군사고문단장은 바실리예프 중장이며 참모장은 포스트니 코브 소장으로 이들이 6·25 선제타격작전 계획안을 수립한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개전초 전선상황을 우크라이나 평원에서의 전차전으로 생각한 판단착오의 책임을 물어 교체됐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51년 후반에는 소련 집단군 사령관인 라주바예프 중장은 소련대사겸 총고문단장으로 겸임 발령하고 참모장에 소지노프 소좌를 기용하여 전쟁을 마감했다.
중국은 6·25개전 초기부터 남북군대의 군사전개 상황을 정확히 보고받고 파악했는데 유성철씨가 중국에 지원을 요청키 위해 북경 모택동 집무실에 갔을 때 그의 집무실 상황지도판에는 빨간표시로 평양이 이미 함락되어 있는 정보상황이 들어와 있었고 군대 파병결정이 난 순간,이미 지원군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6·25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그리고 극소수 집권지도층이 스탈린에게 건의,허락받고 소련 군인이 마련해준 선제타격작전 계획안에 따라 초기에는 소련군,후기에는 중국군을 업고 치른 전쟁임이 이번 증언에서 분명히 밝혀졌다.
일제에서 해방을 쟁취,러시아 공산혁명에 기대어 보려고 우수리지방,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한인공산당이 결성된 사실이나 김일성 집권과정,6·25전쟁 작전계획 원본,모스크바와 평양을 오간 많은 외교문서 등이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보관소에 있다고 알려준 전소련 공산당 국제부 부부장 및 동방연구소 조선부장이었던 티코미로브박사가 일러준 유언을 생각하며 보다 깊이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북방분야를 심도있게 파헤쳐야 할 것이다.<특별기고 최평길 연세대교수>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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