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남민전 사건연루 10년 옥살이/노동의 비인간화 비판 공동체 염원 13일 별세한 시인 김남주씨는 작가 생활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자본주의사회의 치열한 경쟁과 비인간화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적인 공동체 생활을 염원하는 시를 써왔다.
문학평론가 김사인이 『강인한 정신성의 시』라고 평한 그의 시들은 대개가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돼 무기수 생활을 하던중 쓴것이다. 독재정권과 노동의 비인간화에 항거하는 그의 시는 80년대 대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시였다.
74년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진혼가」를 선보이며 등단했지만 본격적인 시인으로 주목받은것은 옥중에 있던 84년 첫시집 「진혼가」를 펴낸것이 계기가 됐다. 이 옥중시집은 광주교도소에 갇힌 시인 김남주를 독재정권에 대한 문학적 항거의 표상으로 부각시켰다.
이후 「나의 칼 나의 피」「사랑의 무기」 「솔직히 말하자」등의 옥중시집을 잇달아 발간하면서 그는 「광주학살」을 가장 격렬하게 몸과 글로 규탄하는 시인으로 우뚝 섰다.
88년 특사로 출옥후 출판된 시집 「사상의 거처」를 제외하면 그의 옥중시집은 모두 담뱃갑 은박지와 휴지조각 책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 교도관 몰래 밖으로 내 보낸것을 친지들이 묶어 펴냈다. 이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쓴 시들이 제대로 인쇄됐는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저항의 표상으로 널리 읽힌다는 소식을 먼저 들었다.
그는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이들로부터는 지나친 사상성을 비판받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끝까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외쳤다.
자신이 이상으로 삼아 온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들이 몰락하고 후배들이 지향점을 상실하고 헤매는 변화앞에서도 『사회의 모든 현상이 시가 된다』며 스스로와 후배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언젠가 따뜻한 서정시를 쓰고 싶다』며 투쟁이 필요없는 진정한 「밝은 사회」가 오기를 기구했다.
병석에 있던 지난해 12월8일자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병마와 싸우는 것이 『시인으로서는 오히려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이며 행운이다』고 밝힌 그를 뜻을 같이 해온 후배들은 『마지막까지 시인이었던 존경하는 선배』로 기억하고 있다.
부인 박광숙씨(44)와는 남민전 사건에 함께 연루돼 만났으며 먼저 출옥한 부인의 오랜 옥바라지 끝에 88년 결혼했다. 김시인은 아들 토일(4)을 걱정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임종한 친지들은 전한다.【이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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