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대신 다시 활기 가득/“무장군인·유혈테러” 살풍경 이젠 옛말/파손건물 복구열기 차·인파 거리 넘실북아일랜드 벨파스트시내 중심대로인 리넨홀거리. 시청사가 들어서 있는 도네갈광장에서 남쪽으로 쭉뻗은 이 거리는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하오 6시, 북위 55도지점이라 땅거미가 이미 내리고 있었으나 도시는 여전히 분주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상점들, 그안에서 북적대는 손님들과 가로등, 네온사인불빛아래 비쳐지는 거리 행인들의 밝고 활기찬 표정들. 지난달 9일 아일랜드공화군(IRA)이 휴전 파기를 선언한 후 런던시내에서 차량폭탄테러가 발생하는등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지만 불안한 흔적은 엿보기 힘들었다.
현지 안내인은 『IRA의 타깃이 영국 정부라는 점을 주민들이 잘 알고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영국본토가 아닌 이곳(북아일랜드)에서 한방의 총성이라도 울린다면 우리는 다시 과거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살얼음판 평화속에 「폭풍의 눈」과 같은 지역이 바로 벨파스트이다.
94년 9월1일 신·구교 양측 무장조직간에 휴전이 성립된 이래 이곳의 거리풍속과 시민 생활상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유혈테러가 일상사처럼 이어지던 시절 벨파스트시민들은 해가 지기 무섭게 쫓기다시피 집으로「피신」해야 했고 상가들도 하오 5시면 어김없이 셔터를 내려 도시의 밤은 암흑과 공포의 천지로 둔갑했다. 대낮에도 언제 어디서 폭탄이 터지고 총탄이 날아들지 몰라 주민들은 시내에 나오기를 꺼렸고 따라서 도심은 갈수록 썰렁해졌다. 이같은 긴장과 불안속의 나날이 25년간이나 지속됐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벨파스트는 「킬링필드」에서 약동하는 도시로 탈바꿈했고 시민들의 삶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도로 곳곳을 가로막았던 바리케이드와 검문소가 철거됐다. 검문검색을 거친 대중버스만 통행이 허용되던 리넨홀 거리를 시민들은 자가용을 몰고 자유롭게 왕래한다. 시내의 모든 도로가 시민들에게 개방돼 통행의 자유가 만끽되고 있다. 외국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관광버스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고 있다.
시내를 쥐잡듯이 24시간 순찰하던 살벌한 중무장 군인들도 거리에서 사라졌다. 느긋하게 뒷짐지고 거리를 도는 경찰들의 모습에서 한가로운 여유가 느껴질 뿐이다. 도로를 이따금 오가는 장갑차 모양의 테러감시차량이 외방객들의 눈을 거슬리게하지만 전에 비하면 활동량이 크게 줄어 거리에서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거리에서 만난 한 젊은 주부는 이렇게 바뀐 거리풍속에 대해 『기적』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의 도심 활동이 크게 왕성해지면서 교통주차난이 시당국의 행복한 고민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과거 공포의 시절에는 대낮에도 텅텅 비어있던 노상주차장이 요즘에는 하루종일 만원사례일 정도로 주차수요가 폭증해 주차전용빌딩이 곳곳에 신축되고 있다. 공공건물이나 쇼핑센터 오피스빌딩 입구에서 눈을 부릅뜨고 서있던 무장 경비원들의 숫자도 크게 줄었다.
하루가 멀게 터지는 폭탄테러로 유리창이 박살나는등 곳곳에 흉하게 파괴되어 있던 건물들도 이제는 거리 어느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때문에 유리가게 주인들의 수입이 한때 줄어들었으나 대신 건물신축붐이 일자 이를 다시 보상해 줘 『역시 평화는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벨파스트뿐 아니라 북아일랜드 전역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벨파스트에서 서북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북아일랜드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런던데리의 경우 전화가 사라지면서 본래의 아름다운 풍경이 다시 빛을 발해 매혹적인 관광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도시는 과거 벨파스트 이상으로 신·구교 무장세력간의 전투가 심하게 벌어져 정부진압군의 탱크자국이 도시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북아일랜드는 테러와 살상 구타가 판을 치던 과거의 몸서리치던 악몽에서 깨어나 회생의 원기를 되찾고 있다. 아직 IRA를 비롯한 양측의 무장세력이 쌓여진 불신의 벽을 쉽사리 허물지 못해 평화 전망을 흐리게 하고는 있지만 주민들 가슴속에는 이제 다시는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강한 평화염원이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벨파스트=송태권 특파원>벨파스트=송태권>
◎아일랜드 분쟁약사/신·구교 400년갈등 독립과정서 증폭/영지배 북부 반세기걸쳐 양측무장조직 살상전
북아일랜드 분쟁은 일종의 종교분쟁이다. 영국왕 헨리 8세가 1534년 정복한 가톨릭왕국 아일랜드의 북부지역에 청교도 혁명을 일으킨 올리버 크롬웰이 17세기 중반 신교도 영국인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잉태된 뿌리깊은 갈등은 1921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계기로 터져 나왔다. 치열한 독립투쟁끝에 구교도가 절대다수인 남부지방은 영국에서 독립(아일랜드공화국)한 반면 신교도가 우세한 북부 6개주는 영국령으로 그대로 남게된 것.
60년대말부터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계 주민들은 대대적인 시민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영국정부의 정치· 경제적인 차별정책에 울분이 폭발한 것이었다. 구교 무장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의 테러가 기승을 부리고 이에 맞서 신교쪽에서도 얼스터 방위협회(UDA)등 무장단체가 구성되면서 양측간에 피의 보복전이 전개됐다. 지금까지 희생된 인명피해만도 사망 3,000여명 부상 3만6,000여명에 이른다.
영국과 아일랜드정부는 85년부터 북아일랜드 분쟁 해결을 위해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지만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다가 93년 12월 「다우닝가 선언」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귀속여부를 주민들의 뜻에 맡기고 IRA가 무장투쟁을 포기하면 평화협상에 참여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94년 9월1일 반세기간에 걸쳐 대립해온 북아일랜드의 신·구교 양측 무장조직간에 전면 휴전이 선언됐다.
그러나 영국측 「선무장해제 후협상개시」조건에 불만을 품은 IRA는 지난달 9일 휴전 파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한 후 런던에서 폭탄테러를 벌여 17개월을 끌어온 휴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영국과 아일랜드정부는 지난달 28일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다자간 평화협상을 6월10일 개시하기로 합의, 평화 노력은 다시 가닥을 잡아 나가고 있다. 비록 IRA측이 강경입장을 고수해 완연한 평화정착은 아직도 먼 여정을 남겨놓고있지만 400년 이상을 끌어온 북아일랜드 분쟁은 서서히 종말을 향해 한발씩 다가서고 있다.
◎“비폭력 전제 정치협상 시급”/마이클 앤크램 영 북아일랜드담당장관/주민·각정파 신뢰통한 합의가 앞날좌우/IRA 테러 재개불구 평화노력 계속될것
마이클 앤크램 영국 북아일랜드담당 정무장관은 최근 IRA측의 휴전 파기선언에 이은 테러활동 재개로 어렵게 틔운 평화의 싹이 꺾일 위험성은 있지만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는 노력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94년 9월 신·구교 무장세력간에 합의된 휴전이 위협받고 있는데.
『휴전의 가장 큰 성과는 주민들이 정상적인 삶을 찾았다는 점이다. 신·구교 지역을 가르는 도로도 개방돼 자유로이 왕래하고 시가지를 순찰했던 군인들의 모습도 찾아 보기 힘들다. 휴전이 이뤄지지 않아 폭력이 계속됐다면 지난 17개월동안도 과거처럼 200명의 귀중한 인명이 또 사라졌을 것이다. 주민들도 이같은 점을 잘 인식하고있다. 그들 마음속에 이미 평화의 싹이 움터 자라고 있다고 본다. 정부와 관련 정파들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평화안착을 위한 해결책은.
『북아일랜드의 모든 정당·정파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정치협상이 조속히 열려야 한다. 그리고 이 협상은 정파들이 폭력의 위협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대전제하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공화파(구교)와 로열리스트(신교) 양측 모두가 폭력수단을 포기, 신뢰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 시급하다』
―북아일랜드의 궁극적인 위상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
『북아일랜드의 미래는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토록 해야한다. 정부가 어떤 방향을 정해 주민들에게 따르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정부의 역할은 북아일랜드의 모든 정파간에 신뢰가 조성될 수 있는 협정이 도출되도록 지원하는 데에만 그쳐야 한다. 어떤 제안도 주민들과 영국의회의 표결, 그리고 북아일랜드내 정파간의 합의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될 것으로 보는가.
『테러리스트들이 헌정에 승복할 자세가 되어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폭력을 선택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북아일랜드주민과 전세계가 동정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런던=송태권 특파원>런던=송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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