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 성행… 집도 사고 판다/해외 친척 둔 사람 감시아닌 선망의 대상/식량난에 ‘입’ 줄이려 뇌물주고 낙태수술도경직된 사회주의체제인 북한사회가 변하고 있다. 94년 김일성 사망이후 극심한 식량난으로 정규 배급체계가 흔들리면서 상설 자유시장과 주택매매 등 자본주의 요소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이와 비례해 당국의 통제력이 약화하고 있다.
우선 식량난을 자체 해결하기 위해 물건을 사고 팔거나, 물물교환을 하면서 상설시장이 95년초부터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됐다. 김경호씨의 부인 최현실(57)씨는 『주민들 대부분이 잡은 물고기나 집에서 만든 빵, 세간살이 등을 시장에 내다 팔고있다』며 『일부는 중국상품을 구입, 보따리장사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의 셋째 사위 박수철(38)씨는 『95년초에 한달에 세번 열리던 회령 농민시장이 그해 하반기부터는 당국의 묵인하에 매일 장이 선다』고 말했다. 막내아들 김성철(26)씨는 『직장이 끝나는 하오 5시30분이후나 휴일에 모두가 장사에 나서 쉬거나 놀러갈 생각은 꿈도 못꾼다』고 말했다.
곡물가격도 계절에 따라 등락한다. 강냉이는 여름철에 ㎏당 가장 비싼 80원에, 가을철에는 가장 싼 50원대에 거래된다. 심지어 자본주의식 매점매석도 생겨났다. 최씨는 『회령의 재일동포 출신 교원(교사)은 가격이 쌀때 밀가루를 대량 구입해 두었다가 가격이 오른 뒤 비싸게 팔려다 적발돼 해직됐다』고 말했다.
주택매매도 새로운 양상이다. 집은 국가소유이므로 매매할 수 없으나 도시의 새 집을 시골 집이나 낡은 집과 교환, 차액을 챙기는 식이다. 거래가 성사되면 집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보통 2달 정도는 살아갈 수 있다. 식량난때문에 집을 판 사람들은 대개 유랑민이 된다.
강원도 원산에 살다 연락이 끊긴 큰딸(39)내외가 대표적인 경우다. 최씨는 『회령 강가에도 외지인 유랑민 6가구가 천막살이를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당국의 통제력도 예전 같지않다. 김성철씨는 『회령시의 한 농장원가족이 지난해 초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이틀만에 체포돼 돌아왔다. 당국은 가족들을 족쇄에 채워 회령시내에 끌고다닌 뒤 가장인 아버지만 교화소(감옥)에 보냈다. 94년 이전엔 가족 모두를 처벌했다』고 말했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식량때문에 탈북하거나 국경을 불법으로 드나들고 있어 이들을 가혹하게 대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다.
주민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일고있다. 김성철씨는 『귀순자소식을 중국인 친척이나 소문을 통해 북한에서도 알게 된다』며 『한국에 가면 죽는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한때 「민족반역자」로 지목되던 탈북자들이 어느새 「머리가 깬 사람」 「난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랑거리였던 「인민군 입대」 「노동당 입당」보다도 생계유지에 더 관심을 쏟는 사람이 많다. 김성철씨는 『전에는 노동당을 「어버이의 당」이라고 부르며 모든 가정의 대·소사나 직장에서 일어난 일을 고해 바쳐 가정불화가 일어나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최근에는 가족들간에 비밀이나 허물을 감싸주는 등 유대가 단단해지고 있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가운데 처지가 180도 바뀐 사람은 재일동포나 미국 등 해외에 친척을 둔 사람들. 감시와 천대를 받았으나 해외송금으로 생활이 넉넉해진 이들은 선망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94년부터 송금액의 일부만 먼저 환전해 주고 나머지는 몇해동안 나눠 바꿔주고 있다.
최근들어 식량난으로 가정마다 「입」을 줄이기 위해 출산을 기피하는 경향이 늘고있다. 이 때문에 북한당국은 지난해초부터 「자녀 많이 낳기운동」을 벌이며 10명이상 출산자는 「모성영웅」칭호를 주겠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나하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모성영웅이냐』며 『의사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낙태하려는 임신부가 늘고있다』고 둘째딸 김명실(36)씨는 전했다.
뇌물거래 등 부패현상도 사회전반에 파다하다. 김성철씨는 『차표를 사거나 병원에 진료를 예약하는 경우에도 뇌물이 없으면 일이 안될 정도』라며 『안전원은 안전하게 해먹고 간부들은 간교하게 해먹고 보위원들은 보이지 않게 해먹는다는 말이 유행』이라고 말했다.<박진용 기자>박진용>
◎해외교포 북 친·인척 지원/북미 종교단체·여행사 등이 접촉창구/북,방북은 엄격선별 송금은 쉽게 허용
해외동포들의 북한 친·인척지원은 어떻게 이뤄질까. 최현실(57)씨는 『뉴욕의 부모님이 92년 8월 연락이 닿은 이후 3개월, 또는 6개월마다 500달러씩 부쳐왔다』며 『부모님은 우리가족뿐 아니라 고모, 이모, 삼촌등 이북의 여러 친지들에게도 돈을 송금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현실씨의 아버지인 재미교포 최영도(79)씨는 90년대초부터 딸을 만나기 위해 북한방문을 부단히 시도했다. 하지만 북측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씨가 어느 경로를 통해 입북을 시도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북미지역에는 3∼4개의 대북 접촉창구가 있다. ▲북한출신의 유력인사나 반한인사들에게 정기적으로 「헌금」을 해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경우 ▲북한 주민돕기운동를 펴는 교회 등 종교단체를 이용하는 경우 ▲북한당국과 선이 닿는 한국계 및 중국계 여행사를 활용하는 방법 등이다.
북한측은 이같은 라인을 통해 유력 교포들을 선별적으로 초청, 동조세력화하는 이른바 「영향공작」을 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해외교포와 북한내부 인사들간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한다.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이 발표된 88년 이후 1,000명을 넘는 해외동포가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원의 95년도 자료에 따르면 방북 해외교포수는 모두 154명이며 이중 재미교포가 126명이다.
북한측은 방북은 엄격히 선별했지만 외화난 타개를 위해 해외교포의 송금은 어렵지 않게 허용했다. 그러나 일부 해외교포들은 두둑한 「달러」를 이용, 중국및 북한의 공안요원과 무역업자 등을 통해 북한내 친인척을 뒷바라지 하고있다. 또 북·중국경 지역에는 「이산가족 사업」을 전담하는 중국인, 조선족 교포조직도 다수 활동하고 있다. 김경호씨 일가의 경우도 중국교포가 연락책을 맡아 도움을 주었다.<박진용 기자>박진용>
◎김일성 특각(별장) 실태/명승지마다 건립 반라 여간호사가 수행
김일성의 전용별장은 평북 창성특각과 묘향산특각, 평남 자모산특각, 함북 온포특각, 강원 원산특각 등으로 전국 명승지에 있다.
74년부터 85년까지 압록강변인 평북 창성군 약수리의 창성특각 경비대원으로 근무했던 박수철(38)씨는 이 특각은 주변에 수풍호와 원시림이 펼쳐 있고 곰 멧돼지 꿩 등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 최고의 명승지에 있다고 말했다.
반나체 차림인 늘씬한 체구의 여간호사가 늘 김일성을 수행했으며 특각에는 아름다운 처녀 관리원 10여명을 배치, 김일성을 즐겁게 해 준다. 『김일성은 5∼7월 매년 한차례씩 40일동안 창성특각에 머무르며 사냥과 수영, 산보, 낚시, 호수유람을 즐겼다.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다녔는데 금수산기념궁전에는 그의 전용차로 벤츠가 전시돼 다소 의아스러웠다. 수영장은 날씨가 좋을 때는 지붕과 담이 자동으로 걷히는 최신식이었고 밤에는 불을 밝힌채 구소련의 노래를 배경으로 정원에서 노래와 춤 잔치가 벌어진다. 특각에는 오락실 음악실 연회실 어린이용공작실 광물표본실 등이 갖춰져 있다. 80년대 중반 김정일이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과 함께 업무차 찾아온 적이 있다』
경비대원들은 빈농출신이나 부모가 없는 청년들 중에서 선발된다.『어버이 수령의 마음을 느끼게 하기위해서인 것 같다. 특각경비대는 근무 여건이 매우 좋다』
10년 넘도록 기억에 남는 사건·사고는 없었다. 『김일성 경비는 호위총국(현재 호위사령부) 소관으로 상주 경비대원은 140명이었고 김일성이 특각에 올 때는 기동대원 500여명이 따로 따라 붙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그렇게 신변 안전에 신경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창성특각은 야산특각과 고산특각, 수영장, 산책로, 선착장, 동·식물원 등으로 이뤄져 있고 방사선 차단을 위해 지붕에 연판(납)이 씌워져 있다.<김병찬 기자>김병찬>
◎서울생활 적응/시위보며 민주주의 실감/‘돈 필요한 사회’ 생각도/TV드라마 ‘임꺽정’ 등 사극 즐겨봐
한달을 넘긴 서울 생활에 대해 최현실(57)씨는 『유치원생이 갑자기 대학생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갑자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알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걱정거리도 많아졌다는 얘기다. 최씨의 둘째 사위 김영환(34)·김명실(36)씨 부부는 『돈이 필요한 사회라 막막한 생각도 든다』며 『옷을 잘 입고 생활수준 따라가자면 아껴쓰고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우선 한자와 영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차가 엄청나게 많아 겁이 나고 공기가 맑지 못한 것도 부담이다.
이들에게 최근의 노동법 시위·총파업 사태는 남한 생활을 알려준 좋은 사례였다. 신문과 TV 보도를 보고 두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노동자들이 권리를 위해 그러는 것 같다』며 『하지만 북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민주주의를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TV드라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다 본다. 아직까지는 현대물보다 「임꺽정」과 「미망」 등 사극이 이해도 잘되고 정서에도 맞는다. 특히 「임꺽정」은 북한에서도 자주 봤던 터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까지 눈에 훤하다. 김명실씨는 『내용은 비슷한데 연기는 북한배우들이 더 잘하는 것 같다』며 『북한 임꺽정인 최창수는 경험이 풍부한 인민배우』라고 말했다. 채시라 심은하 등 예쁜 여자탤런트들이 김씨 일가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남한 여자들이 화장이 심하고 옷차림이 야한데에는 거부감을 나타냈다. 셋째 사위 박수철(38)씨는 『짧은 치마나 바지, 성개방 풍조, 매춘업 등에는 문제가 있다』며 『북한에도 은밀히 매춘이 이뤄지고 있지만 남한 사회는 정도가 심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북한에서 장발족은 규찰대들이 적발해 머리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린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남한사람들은 모두 착해 보인다. 김영환씨는 버스에서 자신을 알아본 승객들로부터 『열심히 살라』는 격려를 들었고 박수철씨는 사람들과 몸을 부딪쳤을 때 『실례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뿌듯했다고 한다. 박수철씨는 『북한에서는 5세 정도 차이면 무조건 「야자」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윗사람을 존중하는 풍속은 사라진지 오래』라고 말했다.
김씨 일가는 지난 17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로 서울 풍납동 광성교회에서 열린 환영예배에 참석, 북한에서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전하는 종교의 다른 측면을 절감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착하게 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는 것이다. 김명실씨는 『어둡고 침침할 줄 알았는데 밝고 따뜻한 분위기였다』며 『자주 나가면 성실하게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 일가는 곧 당국의 보호에서 풀려 일반인의 생활을 시작한다.<김병찬 기자>김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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