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전 라면·조미료로 이땅에 상륙한 이래 우리곁에 시나브로 파고든 일본의 음식문화/간편함과 깔끔함 양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세태 흐름따라 우동·초밥·덮밥집은 ‘거리의 음식점 지도’를 속속 바꿔가는데 바뀌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입맛 뿐일까…자장면이 외식산업을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우아한 차림에 스테이크를 칼질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우리 사회의 입맛은? 일본 음식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지고 있는게 아닐까? 일식집은 불황을 모른다. 우동과 초밥, 일본식 돈까스 등 갖가지 체인점들이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고 있다. 몰려오는 양식 패밀리레스토랑과는 다르다. 양보다는 질을, 분위기보다는 간편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은 일식집을 분주히 드나들고 있다.
주재료가 생선과 야채에, 「약간 모자란다」싶을 정도로 양도 적은 일본음식. 원재료의 색과 맛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조미료는 물론 참기름 깨소금 등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소식과 간편함, 깔끔함의 시대입니다. 일본 음식은 이 모두를 갖추고 있죠』 롯데호텔 조리팀 박병학 과장은 일본 음식의 높은 인기가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음식은 그 시대 문화의 거울이다. 자연과 문화,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경계인 동시에 둘을 포괄하는 문화요소이다.
서울 강남구의 한 일식집. 무역업을 하는 김모(45)씨는 직장동료들과 생선회를 앞에 두고 회식을 하고 있다. 이곳은 그가 회식이나 바이어 접대 때마다 즐겨 찾는 단골집. 모임 때면 음식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지만 생선회로 모아지기 다반사다. 바이어들도 일본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자주 찾게 되었다.
로바타야키가 젊은이들의 유흥문화를 보여준다면 고급 일식집과 참치횟집은 직장인들의 비즈니스 문화를 대표한다.
최근 많이 생기기 시작한 우동집, 덮밥집, 초밥집, 일본식 돈까스집 등은 젊은 직장인들과 신세대들의 인스턴트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보다 간편하고 빠르게, 그러면서도 비교적 저렴하게 알짜만 즐기는 실속까지.
일식우동집은 빌딩가와 대학가라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늘어났다. 「기소야」를 비롯해 전국에 120여 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는 「방방곡곡」 그리고 「기조암」, 「관서옥」 등 12개의 체인점이 최근에 생겨났다.
일본식 우동맛의 비결은 국물맛과 면발. 조미료 대신 가다랭이를 말려 만든 「가쓰오부시」로 내는 시원하면서도 달큰한 국물맛과 도톰하고 쫄깃한 면발로 직장인들과 신세대들의 점심 식단을 장악하고 있다.
일본식 우동집은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진출했다. 망향휴게소와 기흥휴게소에는 각각 96년 1월과 8월에 120석 규모의 「향천」이 들어섰다.
일본식 돈까스도 인기다. 고기가 두텁고 맛이 부드러우며 소스 또한 달콤하다. 오랜 전통을 지닌 「명동돈가스」의 체인점 2곳 외에도 최근 1∼2년 사이 「돈카」, 「도모야」, 「본까스」 등의 체인점이 속속 생겨났다.
지난해 서초동에 1호점이 개장한 덮밥 전문점 「요시노야」는 두산상사가 세계 각국에 체인점을 거느리고 있는 일본의 「요시노야」를 수입한 것. 대기업도 일식 산업에 뛰어든 것이다. 밥 위에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을 얹은 일본식에 미국식 패스트푸드 방식을 결합했다.
음식은 다른 문화에 대한 경계심을 무너뜨린다. 햄버거와 코카콜라가 미국 문화를 수용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듯이 초밥과 우동은 일본의 생활문화를 흡수하게 하는 매개이다. 음식은 그나라 문화를 빠른 속도로 전파한다. 초밥이 젊은이들 사이에 깔끔한 점심메뉴로 자리잡으면서, 때를 같이해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가 있다. 「미스터 초밥왕」. 이 만화는 한 소년이 초밥계(?)에 입문하면서부터 초밥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만화이다. 초밥을 만드는 과정뿐 아니라 일본의 생활상과 정서를 자연스레 접하게 된다.
생각보다 일본 음식은 보다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다. 30여년간 우리 음식문화를 지배해 온 라면과 조미료. 어렵던 60년대. 라면은 싼 값에 5분이면 한끼를 해결해 주었고 조미료는 적은 재료로 맛을 내주었다.
라면이 국내에 처음 선 보인 것은 63년. 일본에서 인스턴트라면이 개발된 지 5년 후이다. 70년대 정부의 분식장려에 힘입어 라면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했으며 지금은 국민 한사람이 연간 80여개를 먹고 있다. 1인당 40∼50개를 먹는 라면 종주국 일본의 두배이다. 조미료도 비슷하다. 56년 「아지노모토」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상업화한 조미료는 이듬해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 현재 일본이 1인당 연간 760여g을, 한국이 1,200여g을 소비하고 있다.
전통적인 음식재료마저 일본화하고 있다. 일부 부유층만이 일본 간장, 된장을 구입해 먹는다는 것은 옛얘기다. 2년여 전부터 백화점과 수입상가 등에서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일본 장류는 가격이 두배이지만 많은 주부들이 애용하고 있다. 재래식 간장, 된장보다 더 달큰한 일본식 장. 가장 기본적인 입맛조차 이렇게 점령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이면 조미료를 푼 왜된장국(미소시루)으로 속을 채우고, 점심은 간단하게 우동으로 때우고, 저녁에는 생선회를 안주로 술잔을 기울이고 2차로 「가라오케」에서 스트레스를 푼다. 이미 우리 속의 일본 음식 문화는 몇가지 메뉴의 먹거리 차원이 아니다.<유병률 기자>유병률>
◎중국집 떠난자리 일식집 ‘우후죽순’/전국 1만곳 성업… 미서도 ‘음식 진주만공습’ 맨해튼에만 체인점 50여곳
외식산업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 음식점은 문을 열고 중국 음식점은 문을 닫는 곳이 생긴다.
8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중국 음식점은 가족외식장소,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였고, 대학생들의 뒷풀이 마당이었으며, 직장인들의 친숙한 회식 공간이었다. 96년 11월, 중국의 전통양식을 그대로 따른 서울 강남의 초대형 음식점 「중국성」이 문을 닫은 것은 중국 음식점의 좁아진 입지를 보여준 것이다.
한국음식중앙업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96년 6월 현재 일식당은 전국에 1만 415개로, 95년 대비 14. 7%나 증가했다. 이에 비해 중국 음식점의 증가율은 3.4%로 둔화했고 양식당은 오히려 2.1%가 감소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일본의 「음식 진주만 공습」이 시작된 지 이미 오래. 「사시미(회)」, 「스시(초밥)」, 「우동」, 「덮밥」 등을 앞세운 일본 음식문화의 내습은 41년의 그것에 비해 조용하지만 훨씬 더 위력적이다. 뉴욕 맨해튼에만 50여 개에 이르는 일식 체인점이 성업중인데 맥도널드 햄버거 체인점 수를 상회하는 숫자다.
양적 성장뿐만이 아니다. 대도시 생활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일식당에서의 한 끼 식사는 그 자체가 등장인물의 재력과 지위, 교양수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만큼 일식은 이미지 메이킹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생선회를 먹을 줄 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뉴요커들이 많다. 이에 비해 여전히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중국 음식점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중저가 브랜드로 고착되고 있어 대조적이다.
이런 사정은 유럽, 남미 등에서도 대동소이하다. 지난 해 프랑스의 주간지 「렉스프레스」가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선정, 발표한 「세계 8대 음식」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스시」가 뽑혀 일식의 승승장구를 증명했다. 나머지 7가지는 코카콜라, 피자, 칠리 콘 카르네, 커피, 쿠스쿠스, 마카로니, 햄버거 등이었다.
바야흐로 「대동아공영권」의 꿈이 총칼이 아닌 음식을 무기로 훨씬 더 큰 스케일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의 김치와 불고기는?<황동일 기자>황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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