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장례식을 치른지 18년/책으로,PC통신으로 대선주자들의 입을 통해 박정희가 부활하고 있다/문민정부에 대한 절망은 독재의 공포를 희석시켰고 신세대들마저 그를 좇는다/독재자가 영웅으로 바뀌는 역사의 아이러니 과연 바람직한 신드롬인가박정희 독재정권에 장례식을 치른 지 18년. 그가 우리 정치·사회의 전면에 강력하게 부활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의 양상은 한껏 공개적이고 당당하다.추앙과 숭상의 목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마치 「제2의 박정희」가 나와야만 우리 사회의 총체적 위기가 단숨에 해소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까지 조성하고 있다. 당연히 해도 너무한 게 아니냐는 경계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신드롬」이 한 때의 증후군이자 유행이라면, 「박정희 신드롬」은 이제 더이상 「신드롬」의 범주가 아닌 것 같다. 「박정희」는 과연 이 시대의 진정한 「선택」이 될 수 있는가? 혹 「망령」은 아닐까?
인터넷과 PC통신에 박정희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결성됐다. 「민족의 지도자」 「민주박정희론」이 서슴없이 정치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온다. 9일 신한국당 경선주자들의 대구 연설회는 「박정희 추모제」를 방불케 했다.
박정희를 소재로 한 이인화 교수의 소설 「인간의 길」이 인기를 끌고 작가 조정래씨도 그를 소재로 한 소설을 준비중이다. 언론도 박정희를 경쟁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과 역대 대통령 등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상위에 랭크됐다.
박정희 신드롬은 현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반작용」때문이라는 분석에 대해 아직 별 이견은 없다. 한보사태에 이은 김현철씨 구속은 문민정부의 개혁에 대한 실망을 넘어, 개혁을 「희화화」한 결정판이 됐다. 여기에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제상황은 국민들로 하여금 강력한 지도력, 경제제일주의에 대한 향수를 부추겼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문민정부에 대한 절망은 독재에 대한 공포를 희석시켰고, 박정희 신드롬은 이같은 토양에서 잉태됐다. 혼란의 와중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박정희 신드롬을 확산시키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증명하기는 어렵다.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홍규덕 교수의 분석. 『강력한 리더십에의 욕구가 왕성할수록 대안과 새로운 리더십의 부재에서 오는 좌절감은 커간다. 이것이 박정희 신드롬의 핵심이다』
주목할 변화는 박정희를 모르는 신세대들마저 이같은 분위기를 좇고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미화가 유신 잔재세력들의 전유물이자 향수 정도로 치부되는 수준이 아니라는 의미다. 한 대학이 얼마전 실시한 복제하고 싶은 인간형 조사에서 박정희는 김구, 테레사 수녀 다음으로 뽑혔다.
박정희 미화의 논리는 박정권이 정치발전에서는 퇴행했지만 경제발전에 있어서는 후한 점수를 받아야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개발독재가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그에 수반된 희생은 부수적인 것이라는 주장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과연 박정희 때문이었는가, 그가 없었다면 경제가 지금처럼 성장하지 않았을 것인가, 당시의 경제개발 모델은 과연 제대로 된 것이었는가 등에 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이같은 논란이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역사를 가정법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에 박정희 신드롬의 허구가 있다는 지적이다. 또 경제개발 과정에서 부의 분배, 인권, 사회, 문화 등은 질식사했고 우리 사회와 경제는 지금까지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도 간과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의 확산은 시민사회의 의식구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더욱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화, 개혁, 정의사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시대착오적인 영웅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집단적 좌절이 독재자를 영웅으로 부활시킬 때 역사는 뒷걸음질 친다. 박정희 신드롬에 허무주의와 낭만주의적 냄새가 배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의식구조가 당장 현실정치에 투영될 때 개혁이나 민주화 등의 언어는 퇴색하고 사회 분위기는 보수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다.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개혁이니 민주화니 하는 구호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은 그 징표다.
동국대 경제학과 송의영 교수는 『강력한 지도자가 없더라도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잘 운영하는 훈련을 쌓아나가야 한다』며 『하지만 지금 상황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자기도피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의식이 아직 제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미성숙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조재우 기자>조재우>
◎‘제2의 박정희’가 등장한다면…/다양한 사회·경제문제 독재적 리더십으론 사회혼란만 초래/청렴성·국가비전은 21세기에도 계승 필요
「제2의 박정희」는 등장할 것인가? 대통령후보 경선주자들과 일부 대선주자가 박정희 찬양론과 후계자론을 펴고, 일반인 사이에도 「박정희 향수」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만약에 박정희와 같은 통치스타일의 지도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우선 부정적 견해. 경실련 유종성 사무총장은 박정희식 통치 스타일과 정책은 이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경제·사회 현안을 해결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과거와 같이 권위주의에 기초한 강제적 해결방식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거둘 지 모르나 다양한 계층·지역·집단간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증폭시킬 것이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합의와 참여, 토론을 통해 조정·통합하는 민주적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다』 유총장은 『정부 주도의 성장 드라이브와 경제 운용은 더이상 불가능하며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될 뿐』이라며 『박정희식 통치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절대권력과 보스정치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류상영 수석연구원은 박정희식 경제정책을 계승한 인물이 나올 경우 우리 경제는 당장 난파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주도 고성장 정책은 더이상 불가능하며 세계경제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는 관주도 정책과 규제, 재벌경제, 보호주의 정책 등 박정권 경제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난관에 처해 있다. 박정희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할 시기에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재등장은 말도 안되는 얘기다. 개방화·국제화 시대에 박정희식 경제정책을 고수할 경우 당장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 당할 것이다. 오늘날 박정희 경제시스템은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고려대 경제학과 이명훈 교수는 「제2의 박정희」 등장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박정희식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대한 희구는 향수일 뿐 정치적 세력화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박정희 향수는 독재의 폐해를 일시적으로 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대표되는 박정희 통치가 부활할 경우 환상이 깨지면서 첫단계부터 강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사회가 진정 박정희의 부활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교수는 『박정희 카리스마는 유신이라는 폭거적 조치와 독재정치에 기초한 것이다. 지금 1인 독재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박정희의 부활은 환상일 뿐이다』고 말했다.
민주당 제정구 의원은 「제2의 박정희」는 등장할 수도 없고 등장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민주화가 생활화한 상태에서 강력한 통치력은 전혀 수용될 수 없으며 유신시대처럼 권력자 1인, 또는 소수만의 독단적 의사결정 시스템으로는 국민통합은 커녕 사회혼란과 갈등만 조장할 뿐이라는 것. 『한마디로 「제2의 박정희」는 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에 비교도 안될 만큼 형편없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 통치스타일과 정책관으로는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제2의 박정희」와 같은 지도자의 출현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박정희와 같은 장기적 비전과 추진력, 청렴성과 자기관리력을 지닌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노철용 회장(전 경향신문 사장)은 『강력한 지도력과 투철한 애국정신, 국가이익 우선주의, 확고한 국가목표와 장기적인 비전 제시,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하고 추진하는 능력, 철저한 자기관리 등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점은 이 시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독재정치까지 미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비민주성을 제외한 새로운 박정희의 출현은 필요하다. 박정희 계승자라면 국민적 역량을 결집, 경제부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 포용성을 겸비한 「제2 박정희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시립대 국문과 이동하 교수는 『유신시대 박정희의 재등장은 시대착오적 현상이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고 열린 의식을 가진 「민주적 박정희」라면 충분히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배성규 기자>배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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