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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占>과 샤머니즘(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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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占>과 샤머니즘(한국의 추억)

입력
1998.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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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癌 발병 알아낸 女점술가에 경탄/美 대학원서 수학전공까지 한 김봉희씨/극비부친 ‘혹’ 위치·갯수 등 정확히 예견/관저설계 趙子庸씨의 샤머니즘·풍수존중에도 감명84년 6월 서울 용산의 미8군 병원에서 나는 겨드랑이의 혹(종기)이 악성 흑색종(腫)으로 전이(轉移)됐으며, 매우 위험한 암(癌)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무부와 국방부 의료진은 내가 3개월이상 살 가능성이 높지않다는 진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미 국무부의 한 내과의사로부터 들은 것은 더 후의 일이었다. 몇번의 추가검사와 함께 대사관 일을 조용히 마무리짓고, 또 당시 한국을 방문중이었던 딸 가족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마친뒤, 나는 워싱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정밀 진단결과가 나올 때까지 건강상의 문제를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서울에 지인(知人)도 많았던 미 정부출신 친구들도 당시 우리에겐 손님들이었다. 나는 한국 친구들과 한국 정부에 단순히 업무협의차 워싱턴에 간다고만 말했다. 헌신적인 아내는 나의 건강에 대한 걱정을 숨기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게 틀림없다. 아내는 내가 떠난뒤 몇몇 친구들에게 이를 털어놓았다. 6월15일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에서 아내가 애써 즐거워하는 웃음을 띠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조동하(趙東河)씨와 그의 부인 마거릿(나은실·羅恩實)이 도착하자 분위기는 바뀌었다.

조씨는 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마세요, 점술가인 김봉희씨와 방금 이야기했는데, 그녀는 내가 워커대사 문제로 자신에게 전화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또 워커대사의 림프샘에 제거해야 할 혹이 있고, 그것이 두개 이상이며 워커대사가 7월말까지 다시 한국에 돌아올 것 등을 알려주었습니다』

김봉희씨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병 치료를 맡을 암전문의를 찾은 것을 포함해 다른 세세한 일까지도 알고 있었는데, 모두 정확했다. 그의 예측은 모두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나는 과거에 점을 약간 우스꽝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아내와 내가 갖고 있던 이같은 회의적 시각을 어느정도 바꿔주었다. 그후 우리는 김봉희씨와 만나게 됐고, 우리 부부와 자녀들의 운명을 예측하는 그의 능력에 경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점이 정말 정확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경탄스러운 이 여성이 미국에서 수학전공의 대학원 과정을 거쳤지만 그 이전부터 「육감(六感)」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육감이란 서양에서는 「초감각적 지각」(ESP;Extrasensory Perception)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는 또 점을 다룬 중국고전인 「역경」(易經)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대사관 직원과 용산 미8군 지휘부에 건강상태를 비밀에 부치라는 지침이 내려왔지만, 절친한 친구인 노신영(盧信永)씨 부부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나왔다. 그들 부부는 떠나는 친구에게 자신들의 기도와 축복이 함께 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했다. 분명히 한국정부의 많은 인사들은 미국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했을 터였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김봉희씨가 예언한대로 내가 돌아온 7월30일, 김포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한가지 밝혀야 할 점은 이것이 ESP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내는 이란성쌍둥이이다. 그녀의 쌍둥이 자매인 릴리안은 미국에서 우리와 1,500㎞이상 떨어진 보스턴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78년 어느날, 아내는 사무실로 전화를 해, 제정신이 아닌 목소리로 빨리 집으로 와달라고 했다. 집에 와보니 아내는 짐을 모두 싼채, 보스턴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당장 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무슨 일이야?』하고 물었더니 아내는 『릴리안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게 틀림없어요. 나는 알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공항에서 아내를 배웅하고 집에 돌아오자 전화벨이 울렸다. 릴리안의 남편이었다. 그는 『리처드, 이런 말해서 안됐지만, 세니가 이곳으로 왔으면 좋겠어. 릴리안이 비장(脾臟)이 막 탈장해 지금 수술중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아내는 이미 떠났어』라고 대답한뒤, 혼란스러워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쌍둥이에 관한 이같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이심전심으로 얼마나 잘 통하는지 알고 있다. 이런 느낌을 표현할 때 나는 지난 45년동안 아내가 자신의 쌍둥이 자매와 대화하는 것을 너무나 자주 들어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들에겐 의사소통할 수단이 없어 사실상 대화는 처음부터 있을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김봉희씨와의 만남, 그리고 집에서 느낀 몇가지 경험은 서양에서 한국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주 무시하던 한국 문화의 한 단면, 이를테면 샤머니즘이나 샤머니즘과 점과의 관계에 더 흥미를 느끼게 했다. 김봉희씨는 분명히 그를 「카리스마적 점술가」로 분류하도록 만든 초심리학적인 연관관계를 지닌 어떤 영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의 고전인 역경과 연결되는, 보다 전통적인 운명 예언방식을 따랐다.

81년 대사직에 부임한지 얼마뒤 아내와 나는 존 카터 코벨 박사를 알게 됐다. 그는 「한국문화의 뿌리」란 제목으로 한국의 영자지 코리아 타임스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었다. 한국의 전통 민속종교와 관련된 예술형태와 샤머니즘의 특이한 예술적 표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여성 예술사학가였다. 샤머니즘은 5,000년이상 불교, 유교, 서구 및 일본의 경멸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존속해왔다. 친구이자 동료인 함병춘(咸秉春·83년 작고) 박사는 81년 「한국문화」(Korean Culture)라는 잡지에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두개의 중요한 기사를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우랄­알타이 뿌리와 연결돼 있는 한국의 전통적 애니미즘(Animism)이 아직까지 한국민의 세계관과 가족, 사회생활 양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분석했다. 나는 한국의 과거사에 대한 이같은 면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약 14년전의 암 경험과 한국민의 운명예언을 지칭하는 「점」에 관한 김봉희씨의 탁월한 능력을 경험한뒤 나는 한국을 복잡한 세상과 떼어놓게 만든 「점 문화」의 새로운 일면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샤머니즘에 대한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또다른 중요한 사람이 있는데, 훌륭한 예술가겸 건축가인 조자용(趙子庸)씨이다. 그는 필립 하비브 대사가 72년 새 대사관저를 설계하기 위해 뽑은 사람이었다. 하비브대사는 워싱턴으로 가 국무부의 담당부서­「Foreign Buildings Office」­관료와 한바탕 전쟁을 치른 끝에 승리했다. 국무부는 새 관저를 표준 콘크리트와 유리로 지을 것을 원했다. 하비브는 그들을 제치고 「캐피틀 힐」(Capitol Hill·미 의회)의 상하원 의원과 직접 얘기했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해 편의시설은 비록 현대식으로 하더라도 전통적인 한국스타일로 관저를 짓도록 했다. 그 결과, 나는 대사로서 서울에서 가장 우아한 한국풍의 집에서 살수 있었다. 한국문화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82년 8월25일 우리는 관저설계를 도운 조씨와 한국문화 부서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무했던 버니 러빈(전 서울 미 문화원장),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를 관저 만찬에 초대했다. 우리는 조씨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 훌륭한 모임이었다. 왜냐하면 조씨는 가슴따뜻한 유머와 정열, 약간 변덕스럽지만 항상 역사인식이 결합된 속사포같이 힘있는 말투가 놀랍도록 잘 조화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한국말이건, 일본말이건, 영어건 어떤 말로 얘기해도 그의 스타일은 배어나왔다. 조씨는 관저 건축과 관련한 세세한 일화 몇가지를 설명했다. 놀랍게도 그중 많은 부분이 그가 전문가로 공인받은 샤머니즘 전통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60년대말 윌리엄 포터가 대사로 재직했을 당시부터 나도 한때 머물렀던 옛 관저는 150년이상 됐다. 어떤 부분은 심지어 이 보다도 더 오래됐다. 후임 대사들이 지붕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흰개미가 대들보를 갉아먹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은 이같이 위험한 상황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과 서양에서 이름을 떨친 건축가 조씨는 옛 가옥을 사서 이를 복원하는 작업을 해왔다. 옛 가옥과 관련된 영(靈)적인 면에 대한 관심때문이었다. 새 관저를 지으면서 그는 관료적인 여러 문제에 부닥쳤다. 그는 관저 건축 4년간 때로는 한국의 전통적인 목수와 함께 일하기도 했다. 조씨는 영적 소망과 과거의 샤머니즘에서 나온 많은 전통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거의 한국민속을 관저에 옮겨 짓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옛 가옥과 똑같은 일반적 양식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하나의 지붕밑에 허용된 전통적인 건축한계를 넘게 됐다. 한국의 가옥은 보통 한개이상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전통 유교사회에서 왕족이 아닌 일반인의 숙소는 하나의 지붕밑 마루에서 99칸을 넘을수 없도록 돼있다. 조씨가 완성한 미 대사관저는 147칸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한국의 건축가는 수세기전 샤머니즘적인 배경에서 기인한 다양한 양식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가옥에는 전통적으로 「성주」(상량신·上樑神·집을 지키는 신령)를 중시했다. 이 중심 대들보에는 그 신령을 불러온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또 하나 흥미있는 것은 조씨가 가옥에 대한 원초적 풍수(風水)설을 고집한 것으로 거실의 화로 한가운데 쓰여있는 한자(漢字)와 관계가 있다. 그것은 한국사람이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할 때의 「녕」자인데 옛 가옥에는 「寧」이라는 글자가 잘못 쓰여있었다. 그러나 잘못 쓰여진 글자를 바꾸는 것조차 하면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풍수를 거스를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정대로 조씨는 자신이 서울에 소장하고 있던 샤머니스트의 미술작품 및 유물들을 82년 속리산에 설립한 새 건물로 옮겼다. 우리는 샤머니스트의 의식(굿)을 보고, 또 무당이나 샤머니즘적 의식을 행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여러번 그곳을 찾았다.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한국 시골의 전통양식은 북, 꽹과리, 그리고 샤머니즘의 전수자가 행하는 춤과 연계돼 있다. 아내와 나는 여러번 그곳을 찾아 전수돼 내려오는 민간전통에 대한 조씨의 설명을 들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샤머니즘적 전통에서 호국(護國)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호랑이와, 동양의 신비스런 청룡(靑龍)에 대한 경이로운 미술품을 그는 재생해냈다. 조씨의 에밀레 민속박물관은 지난 15년만에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문화전통에서 매우 특별한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정말 큰 공헌을 했다.

유교 및 당시 기독교 지도자가 초기에 한국 샤머니즘의 상징물과 풍습을 비난한 것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롭다. 자연스럽게 이들과 승려들은 전통민속학, 특히 미술품, 조각, 호국의 상징물등을 인정하게 됐다. 한국인들은 미신에 근거한 전통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타클로스나 부활절은 어떤가? 미국사람한테 할로윈(10월31일)을 설명해달라고 해본적이 있는가?

샤머니즘적 양식이 갖는 가장 큰 호소력중 하나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무당은 대부분 여성이다. 나는 한국에서 각종 상을 휩쓴 한무숙(韓戊淑·93년 작고)씨의 소설「만남」(영문판 「Encounter」)을 읽는데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딸인 김영기(金榮起) 교수는 95년 내가 지금까지 보물처럼 아끼는 그 책 한권을 선물했다. 「무당의 딸」이라는 제목이 붙은 제4장은 한국에서 샤머니즘과 다른 종교간 초창기 대립양상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함병춘씨는 사려깊은 분석이 돋보이는 여러 시론(時論)에서 『샤머니즘적인 인간은 자연의 흐름에 가장 잘 순응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삶과 죽음의 현실에 직면한 한국의 마을 주민과 직접 대면했던 나의 옛 만남을 되돌아보면, 나는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 놓여있는 한국민의 혈족관계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이해할수 있었다. 혈족관계는 인류와 자연으로 향하는 샤머니즘적 접근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난 수년동안 한국친구들과의 교제에서 얻었던 똑같은 혈족의식을 향유할수 있게 됐으며, 이는 내가 한국에서 친분을 쌓았던 많은 지인(知人)들을 왜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를 설명해 준다.

한국은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로 돼 있다. 그리고 일정기간 한국에 머물렀던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초기 샤머니즘적 뿌리가 갖고 있는, 상존하는 힘을 이해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그 샤머니즘적 뿌리는 변화하는 시기에 깊이 각인돼 있다. 또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갖는 본질의 다양성과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워커 前 주한美 대사 번역="황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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