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해군 포항경비부 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전 해군준장(당시 중령)은 10일 『포항에서 주민 200여명을 처형·수장하도록 명령했었다』면서 『당시 처형을 명령한 당사자로서 평생을 자책하면서 깊이 후회하고 있다』고 밝혔다.다음은 그의 증언을 당시 상황에 따라 요약·정리한 내용이다.
『50년 7월초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포항경비사령부에 좌익분자를 처형하라는 명령서가 하달됐다. 이 명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 등에게 각각 내린 것이다.
경찰의 명령은 조병옥 내무장관이 김병원 치안국장을 통해 각 도경국장에 하달됐으며 경북의 경우, 명령을 받은 조제천 도경국장이 전언통신문으로 각 경찰서에 다시 명령했다. 포항경비사령부는 명령을 수령한 후 포항·경주·영덕 경찰서의 협조로 용공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각 경찰서 관할지역 주민 400-500명을 체포했다.
이들에 대한 신원분류는 이종환 포항경찰서장, 이강학 경주경찰서장(3·15부정선거 당시 치안국장), 박주현 영덕경찰서장, 포항경비부 정보참모 차병엽 중위, 헌병대장 고윤석 중위, 정보장교 박재옥 중위 등이 함께 했다. 물론 재판 같은 것은 없었으며 이들중 200여명을 처형대상자로 분류하고 나머지는 귀가시켰다.
처형대상자들을 군함 3척에 태우고 포항을 출발, 영일만 장기등대 동쪽 3-5㎞ 지점 바다로 나갔다. 함상에서 이들을 총살하고 모두 수장시켰다. 피살자들은 대부분 중장년 남자들이었지만 여자들도 있었다. 피살자들이 다시 떠오르지 못하도록 몸에 돌을 매달아 바다로 던졌다. 처형은 해군 장병들과 경찰이 집행했으며 군경의 수는 약 반반이었다. 당시 포항경비부 참모장이었던 박병태 소령(해사 1기)도 사건 전모를 소상히 알고 있다』
LA미주본사=한우성기자
■[남상휘씨 누구인가] 한국전쟁때 혁혁한 전공
남상휘씨는 1925년6월 서울 출생으로 1946년 해안경비대에 입대, 포항경비부사령관(중령)으로 한국전쟁을 맞았으며 1952년 해병대로 옮겨 해병 제1전투단 부단장으로 김일성고지전투·백마고지전투 등을 치렀고 을지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 미국 동성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1959-60년 해병 제1전투여단(준장)을 지내고 진해 해병교육기지사령관(준장)으로 있을 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육군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 등과 함께 반혁명분자로 체포돼 서대문교도소 수감중 예편돼 1961년 8월 미국으로 건너와 이후 정치망명, 지금까지 미국에 살고 있다. 남씨가 미국에 망명을 요청하던 1983년 당시 미국 체류중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1983년 12월 7일자로 「오랜 친구인 남씨의 망명을 허락해달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남씨는 『직접 배를 타고 나가지는 않았으나 처형은 사령관으로서 내가 명령한 일이다. 이 일로 평생을 자책감 속에 살았으며 깊이 후회한다』면서 『반세기가 지난 일이지만 한국 정부는 후손을 위해서라도 올바르게 사실을 정확히 규명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청문회라도 연다면 참회하는 심정으로 사실대로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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