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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한 순간] 김선우 「어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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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한 순간] 김선우 「어라연」

입력
2000.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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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어라연 계곡 깊은 곳에/어머니 몸 씻는 소리 들리네// -자꾸 몸에 물이 들어야/숭스럽게스리 스무살모냥…/젖무덤에서 단풍잎을 훑어내시네//어라연 푸른물에 점점홍 점점홍/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어라연 깊은 물/구름꽃 상여 흘러가는/어라연에 나, 가지 못했네」당신, 어라연에 가보셨나요. 동강의 젖줄이 풍요롭게 소(沼)를 이루는 어라연 깊은 계곡에서 나는 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인간의 기억으로 측량할 수 없는 까마득한 시간의 저편으로부터 삼라만상을 길러온 어머니. 아름답고 고독한 자연이라는 어머니 앞에 나는 오래도록 오체투지 하였습니다. 딱딱하게 죽은 내 영혼의 빛깔들을 어머니 앞에 부려놓고 자연이 스스로 나의 거짓된 빛깔들을 거두어갈 때까지 오래오래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림의 어느 순간이 불현듯 열리고 순간의 색채들, 순간에서 순간으로 유영하는 끊임없는 유동성의 빛깔들이 심연에 닿는군요. 빛과 바람의 주름을 따라 달팽이관처럼 이어지는 길, 처음이며 끝인 그 길에 아득하게 열린 물의 자궁 속으로 내가 흘러듭니다.

둥글고 유연한 물의 자궁.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한 어머니를 만납니다. 한숨과 눈물 많은 내 어머니, 어라연 깊은 계곡은 늙고 병든 한 어머니를 맞아 고즈넉이 그녀의 몸을 씻겨주고 있었습니다. 푸르게 출렁이는 양수. 어라연에 들면 내 어머니도 한 따님일 뿐이지요. 어머니는 두근거리며, 부끄러워하며, 젖무덤에 아름답게 돋아난 단풍잎을 훑어냅니다. 어라연 푸른 물에 점점홍점점홍.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붉디붉은 단풍잎 위에 이제 막 태어난 바람이 머뭅니다. 옹알이를 합니다. 지극한 통과제의를 거쳐 비로소 한 호흡이 시작되고 나는 가만히 어머니의 빗장뼈에 손가락을 대봅니다. 젖무덤엔 다시 붉은 딱정이가 앉고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한잎의 계절이 움을 틔우겠지요.

누구도 어머니들의 고적한 목욕을 방해해선 안되는 그 계곡이 지금은 상거래와 레저의 이름으로 북적대고 있다지요. 물과 땅과 어머니를 사고 팔고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속된 시대에 어쩌면 어머니는 스스로 자신의 상여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명과 욕망의 이름표를 버리지 않고는 당신과 나, 어라연에 영영 갈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가서는 안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김선우 시인·96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시힘」동인·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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