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가 나를 감옥에 가뒀지만, 사랑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에 영화‘허리케인 카터’(감독 노먼 주이슨)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루빈 허리케인 카터(덴젤 워싱턴)가 살인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순간, 가수 밥 딜런은 빈정거리듯 이렇게 노래한다. “이것이 바로 허리케인의 억울한 스토리. 죄를 짓지 않았건만 사법당국은 그에게 족쇄를 채웠고, 챔피언이 될 수도 있었건만 그는 감옥에 갇혔다네.”1967년 미국 뉴저지주 페터슨에서 일어난 실화였다. 루빈은 프로 권투선수였다. 그것도 전도가 양양한 미들급 챔피언 후보였다. 그러나 66년 7월 한 술집에서 일어난 총기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됐다. 모든 증거와 진술과 목격자는 조작됐고, 배심원들은 그를 평생 감옥에 살도록 했다. 여기에는 지독한 편견이 들어 있었다. 인종차별주의자로 사건조작에 앞장선 델라 형사(댄 헤다야). 배심원은 모두 백인이었고 판사도 백인이었다.
그곳에는 흑인의 ‘정의’란 없었다. 오직 폭력적 억압과 멸시 뿐이었다. 그에 맞서 폭력으로 정의를 지키는 방식. 그것은 곧 루빈에게 어린 시절부터 소년원 복역이라는 자유의 박탈로 이어졌다. 복싱은 생존을 위해 ‘내 몸을 무기로 만들기’였다. 링밖 세상과의 전투인 ‘제16 라운드’(그의 옥중자서전 제목이기도 함)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증오는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두번의 재심이 기각되면서, 그는 인간에 대한 어떤 믿음과 기대도 버렸다.
‘허리케인 카터’는 노먼 주이슨 감독의 ‘밤의 열기 속으로’ ‘투쟁의 날들 ’ ‘저스티스’의 연장선상에 있다. 평등 자유 정의에 관한 그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현실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그속에 인간이 얼나마 고통받는가. 그리고 나서 그는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인간 속에 있고, 그 휴머니즘이야말로 인류의 최고 가치라고 말한다.
‘허리케인 카터’ 역시 그 공식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기승전결을 거쳐 모범적으로 따라간다. 먼저 누명을 쓰는 관객에게 보여 더욱 정의를 갈망하게 만든 다음 자서전을 읽은 흑인소년 레슬리를 등장시켜 먼 자유와 정의로의 항해를 시작한다. 그 항해의 일등공신은 올해 아카데미의 강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른 덴젤 워싱턴이다. 링에서 그의 모습은 ‘성난황소’의 로버트 데니로나 ‘더 복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비견되고, 혼신의 힘을 기울인 내면의 자아와의 갈등에서 그의 원숙함을 본다.
그러나 두 흑인의 교감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백인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실화라 하더라도 환경운동을 하는 캐나다 여인 리사(데브러 카라 웅거)와 그의 동료들의 희생적인 노력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치이다. 그 가치가 16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루빈에게 자유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주었다. 감상적인 휴머니즘과 상투적 결말. 때론 실화가 유치하고 진부하다. 18일 개봉. 오락성★★★☆ 예술성★★★★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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