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를 찌른 역전의 드라마였다.정몽헌(鄭夢憲)현대 회장이 24일 오후 귀국할 때만 해도 그의 측근들 가운데서도 형인 정몽구(鄭夢九)회장의 뜻대로 마련된 인사구도가 깨질 것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정몽헌회장은 귀국 3시간만에, 열흘동안 구석으로 몰리던 상황을 일거에 되돌려놓았다. 오히려 힘이 더 강화했다.
○…정몽헌회장은 이날 도쿄(東京)발 JD251편으로 오후2시께 귀국했다. 굳은 표정으로 입국한 김포공항에서 정회장은 기자들로부터“이번 현대증권 인사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에게 묻지말라”고 대답한 후 서둘러 김포공항을 빠져나갔다.
현대그룹 본사 사옥 12층 집무실로 직행한 정회장은 김재수(金在洙)구조조정위원장겸 현대건설 부사장, 김윤규(金潤圭)현대건설 사장 등 측근들과 대책 협의에 착수했다. 현대빌딩 맞은편 건물에서는 정몽헌회장이 와이셔츠 차림으로 수차례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치밀하게 전략을 짜는 모습이 목격됐다.
1시간여 후 김재수위원장과 김윤규사장이 먼저 승용차편으로 가회동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집으로 달려갔다. 이어 7분여 후 정몽헌회장이 뒤쫓아갔다.
○…오후 3시50분부터 정명예회장과 정몽헌회장 진영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대화 시작 10분여 뒤에는 이익치(李益治)현대증권 회장도 합류했다.
정몽헌회장은 “그룹 최고경영자 인사는 본래 구조조정위원회가 발표하도록 돼 있는데 현대자동차측에서 언론에 흘려 ‘여론몰이’식으로 무리하게 인사안을 강행, 현대 인사파동을 불러일으켰다”고 강조했다.
이익치회장도 “명예회장께서 지시하시면 어디든 가겠지만 이번 인사는 마치 현대자동차가 발표한 것과 같이 됐고 결과적으로 그룹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다”고 거들었다.
정몽헌회장과 측근들이 설득을 시작한 지 30여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정주영명예회장이 “됐다”는 짧은 한마디를 내던졌다. 인사 내정안이 백지화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현대증권 인사 내정안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발표가 나오자 현대자동차 임직원들은 일제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한 임원은 “정명예회장이 예전부터 자신이 결정한 사항을 번복한 적이 없는데다 자신이 살던 청운동집을 정몽구회장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아 현대증권 인사 번복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했다”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정몽구회장 역시 막판까지 승리를 자신한 듯 했다. 그룹 구조조정위원회 발표 직전 기자들과 복도에서 마주치자 여유있는 표정으로 “몽헌이가 해외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정몽구회장의 한 측근은 “오늘 그룹 구조조정위원회의 발표만 갖고 앞으로의 상황을 예단하기는 곤란하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박정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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