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아방가르드’(전위작가) 김구림(64)씨가 오랜 미국 방랑생활을 접고 최근 영구 귀국했다.“지난해 말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회고전 제의를 받고 예술가로서 저의 삶을 정리할 시기가 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 인생은 한국에서 보내고 싶어 귀국을 결정했습니다.”
그의 새로운 보금자리인 서울 평창동 자택. 아직 이삿짐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자택 반지하에 마련된 그의 작업장엔 이미 그림이 가득차 있었다.
그는 9월 21일~10월 11일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전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9월 20~30일 가나 포럼 스페이스에서 근작전을 앞두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작업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
그는 1991년 미국 캘리포니아 MMOA(The Modern Museum of Art)로부터 기획전 초청을 받고 88년 작품 준비 차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 정착했다.
10여년 만에 다시 전시회가 계기가 돼 고국의 땅을 밟은 셈이다.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안경과 중절모를 벗은 그의 모습은 왠지 낯설었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60년대 액션페인팅과 퍼포먼스로 눈길을 끌면서 화단에 등장, 60년대말~70년대 박서보, 박석원, 이건용, 하종현과 함께 에이지(아방가르드의 약자)그룹을 결성, 실험적인 작업을 펼쳐왔던 김씨는 한국의 전위미술 1세대로 자리매김되는 중진작가이다.
김찬동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관장은 “대지예술, 개념예술, 행위예술도 초창기 그를 통해 소개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판화가, 회화작가, 설치미술가 심지어 연극 영화 안무 등 다양한 예술세계를 탐구해 온 작가로도 유명하다.
LA와 뉴욕 생활 중에는 미국의 신표현주의에 몰입하기도 했던 그는 “너무 오랜 외국생활 탓인지 왠지 국내 화단에서 배척하는 분위기”라고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아직 한국 화단은 케케묵은 이론만을 고집한 채 너무 좁은 시야를 갖고 있다”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자기 세계를 한번 구축한 후엔 평생 변하지 않고 비슷한 작품만 계속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요. 시대변화를 따르지 않는 작가들은 매너리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모터보트가 강가를 휘젓고 돌아다니는 요즘, 아직도 낚싯대 드리우고 뱃사공이 한가롭게 노젓는 배나 그리는 그림이 말이 됩니까? 작가는 자신의 시대를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우연히 그의 작업실에 들렀다 즉흥적으로 전시회를 결정했다는 가나아트 이호재 사장은 “한 화면에 파노라마처럼 극사실과 비구상, 이를 풀어놓은 그림 등으로 면 분할을 시도한 최근 작들이 상당히 좋았다”면서 “앞으로 가나아트와 입체적인 판화작업도 함께 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작가표현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구상’ 회화의 한계를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줄곧 실험성 짙은 작업만을 해온 탓에 사실 제도권 화랑으로부터 외면받아왔던 그는 미술팬들로부터는 판화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가정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었던 김구림씨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서 “회고전을 위해 과거 오브제 작업에서 최근 평면까지 옛날 훼손되거나 사라진 작품들을 리메이크 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늘 변화를 모색해온 때문인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그림은 여전히 젊었다.
송영주기자
yj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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