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여름 월남하던 때의 일이다. 평양에 살던 우리 가족중 열아홉살의 나와 열한살의 여동생이 가장 먼저 내려오기로 했다. 38선 근처 친척집 방문을 가장해 젊은 아주머니 안내원을 따라나섰다.어머니는 낯선 안내원에게 두 딸을 맡겼지만 내심 불안했던지 기차 꼬리가 모서리를 돌아설 때까지 빨간 부채를 흔들었다.
어느 역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일단 내려서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했다. 하지만 개찰구에서 잔뜩 긴장한 우리 자매의 눈빛을 알아챈 수사요원이 우리를 수사실로 끌고 갔다. 먼저 개찰구를 나간 안내원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지 한참 후에야 우리는 풀려났다.
낯선 고장의 어두컴컴한 밤거리에 내쳐진 우리 자매의 손에는 단 한푼도 없었다. 평양역을 떠나기 전 여비 전액을 안내원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안내원이 어머니에게 약속한 것은 우리 둘을 밤 배에 태워 예성강을 건너 개성에 도착하도록 주선하는 것이었다.
월남의 첫 관문에서 좌절하고 당황한 가운데 혹시 잘 만한 곳이 있을까 밤거리를 배회하던 바로 그 순간, 도망간 줄 알았던 안내원이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 안내원 역시 우리와 헤어진 뒤 크게 걱정하면서 우리를 찾았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월남 과정에는 아픈 사연이 많았다.
이런 것도 있었다. 몇 가족이 탄 배가 감시망을 뚫고 물살을 헤치고 있을 때 젖먹이가 울기 시작했다. 함께 탄 사람들이 겁에 질려 부모를 몰아세우자 부모는 하는 수 없이 아이를 강물에 집어넣었고 동틀 무렵 배는 무사히 남녘 땅에 당도했다. 하지만 부모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자 월남의 의미를 상실한 부모가 아이를 따라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가슴 아픈 상황은 아니었지만 당시 우리도 이만저만 걱정을 한 게 아니었다. 안내원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하고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우리는 그날 밤 안내원의 집에 도착해 곧바로 배를 타고 개성에 도착했다.
최근 남북이산가족들이 가족 찾기에 흥분하고 있다. 나도 북녘땅 외가 친척들이 보고싶다. 그러나 맨 먼저 찾고 싶은 사람은 그때 그 안내원이다. 그 바람이 이뤄지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박영숙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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