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받고 싶었던 상이었어요., 감사합니다."하성란(河成蘭ㆍ33)씨는 수상을 알리는 전화에 '꼭 받고 싶었던 상'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서 각종 문학상의 상업성이나 문단의 계파나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이 상에 대한 믿음이 느껴졌다. 그를 선정함으로써 언제나 패기 있는 작가정신의 손을 들어준 이 상의 전통도 다시 확인되는 듯했다.
수상작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원고지 100장 가량의 단편소설이다. 그는 이 길지 않은 소설 속에서 악몽 같은 우리 생의 현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실들이 곧 진실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몸서리쳐질 정도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머니 뒤집어버리듯 한 순간에 먹혀버리는' 생의 진실이 끔찍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의 다른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렇듯 이름 없는 여자 '나'이다. 그 익명성은 단자화한 개인, 그들의 소통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여자가 약혼자의 생일 축하를 위해 그의 자취방으로 찾아간다. '우리의 결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무엇보다 난 내가 결혼할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취방에 약혼자의 고교 동창이라는 3명의 남자가 모여 있다. 여자는 동창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가벼운 욕설을 하고, 점차 사나워지는 약혼자에게서 '낯선 사람'을 본다.
술 취해 누워 엿듣게 된 대화에서 그들이 '파우스트'라는 모임의 일원이며 15년 전 고교 2학년 때 한 여자 아이의 추락사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여자는 이어 자신의 엉덩이를 더듬는 약혼자의 것이라 생각되는 손에 '어떻게 이렇게 어두울 수가 있을까'라 뇌이며 '어둠 속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하룻밤의 일로 임신한 여자는 약혼자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약혼자는 뱃속에 든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머지 남자들도 모두 부인한다.
이 부분까지는 완벽한 배반의 드라마이다. 하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의 드라마로 소설을 끝낸다. 여자는 아파트 옥상에서 캐롤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듣는다. 그리고 깨우친다. '뜻밖의 임신으로 당황했을 사람이 나 말고도 여기 또 있었다.'
'그 남자들의 우정은 20년 후에도 40년 후에도 지속될 것이다'라는 여자의 말은 인간의 변함없는 악마성에 대한 절망이지만, '내 아가, 난 널 사랑한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강한 구원에의 의지를 나타낸다.
이 소설은 그 전 작품들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그는 '마이크로 묘사'라 불릴 정도로 세밀한 묘사, 마치 카메라를 대고 찍은듯한 정밀한 묘사로 정평 있는 작가다. 치밀한 문장은 점점 가벼워지는 우리 소설문학에 고전적 엄격함을 되살렸다는 평을 받았다.
이제까지 그가 낸 두 권의 창작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에 실린 작품들에는 단 한 문장도 겹따옴표(" ")로 대화 처리를 한 글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절제된 대화와 스토리의 긴박감도 살리면서 그만의 문장미학도 잃지 않은, 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끔은 길 가다가도 내가 과연 나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이 과연 진실인가, 저 누구는 자살한 것이 아니고 타살당한 것이 아닐까. 경계가 사라져버린 꿈과 현실, 사실과 환상.익숙한 현실 뒤에 잠복한 인간과 집단의 폭력성을 그려본 소설입니다. 기존의 묘사 위주에서 스토리 위주로 써본 글입니다."
그는 "현실을 볼 때 선은 결코 악을 당할 수 없다"며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일부러 위악적으로 쓴 작품이라고 말했다. 최근 그는 이러한 경향의 '파리' '악몽'등을 발표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에 이어서는 노래를 제목으로 해 10여편의 연작소설을 쓸 작정이라고 했다.
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그는 일찍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거대한 도시의 일상에서 먼지처럼 쌓이고 묻히다 날려가버리는 익명의 존재들, 우리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소외되고 고독한 개인들의 모습을 그는 건조하면서도 그만큼 명료한 문체로 다뤄왔다.
"소설가는 무당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시대를 예시(豫示)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문학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그는 "시대적 상황이 큰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 전체를 움직이기 힘들다면 이제는 '작은 이야기'가 더 소중하다.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만큼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작가들의 역할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며 "문학의 위기 운운하지만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씨는 딸(6) 하나를 키우는 주부이다. 남편 송민호(34)씨는 시나리오 작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글을 써서 중고교까지는 각종 글짓기대회에서 상을 탄 덕분으로 "공책을 사서 쓴 적이 없다"는 자칭 '소싯적 문학소녀'이다. "활자들은 다 내게 별이었다."
고교 진학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상업학교로 진학했던 그는 4년간 무역회사에서 일하다 늦게야 서울예전 문창과에 입학했다.
그의 두 권의 창작집은 소수 문학독자들에게는 '한국문학의 미래'라는 극찬을 받았어도 일반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올해 그가 낸 두번째 장편소설 '삿뽀로 여인숙'은 독자들의 사랑 속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남편 덕에 독자들은 하씨의 얼굴을 영화에서도 볼 수 있을 것같다. 곧 개봉하는 송씨가 시나리오를 쓴 '클럽 버터플라이'라는 스와핑(부부 교환)을 다룬 영화에 하씨는 깜짝 출연(카메오)하기도 했다. 차분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이면에 엄청난 고집과 열정을 숨기고 있는 작가다.
▲심사평
안이한 결말불구 새로운 性방향 제시
예심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총 8편. 대상 중럽步玆湧~ 각기 정독한 후, 회동한 심사위원회는 최근 작단의 부진을 실감하면서, 그 가운데 심상대의 '美', 윤성희의 '모자', 그리고 하성란의 '기쁘다 구주 오셨네'에 주목하였다.
심상대는 이 단편에서도 능숙한 서사력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작가가 최근 몰두하고 있는 유미주의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물론 남루한 현실과 아름다움의 탄생이 맺고 있는 섬뜩한 관계의 통찰이 흥미로운 바 없지 않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는 그 지경이 일종의 엽기(獵奇)로 빠져 안타깝다.
윤성희도 신인답지 않게 매우 안정된 서사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또한 남성 내지 남성주의에 대한 공격에 골몰해온 90년대 여성작가들의 일반적 작풍과 달리 두 여자 주인공의 따듯한 자매애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독특한 각도도 신선한 바 없지 않다.
그런데 밝은 대신 가벼운 게 걸렸다. 자기를 배신한 인물에 대해 한없는 관용으로만 다가서는 여주인공의 형상은 산문성에 미달하는 게 아닌지 의심도 간다.
시야도 제한돼서 일종의 쇄말주의적(?末主義的) 경향도 엿보이는 게 흠이다. 그녀의 후속 작업을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하성란의 작품에 대해 길게 토론하였다. 먼저 이 작가가 너무 영화에 의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지적이 나왔다.
이 작품은 총각파티를 벌이다가 변사(變死)한 창녀의 죽음을 은폐하려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어느 미국영화의 발단과 유사한 구도를 공유하고 있다.
또한 남성적 폭력에 대한 정면 대응 대신 아기만 받아들이는 마리아적 결말도 안이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왕 남성의 문제에 칼을 뺐으면 끝까지 결판을 내야지, 일종의 종교적 관용으로 나아가는 것은 남성의 세계를 괄호침으로써 오히려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모양새가 될 공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세 작품 중 가장 우수하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었다.
약혼자의 고교 동창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들의 옛 비밀을 알게 된 여주인공이 잠결의 성교로 결국 약혼자로부터 파혼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단호히 못난 남근주의와 결별하면서 자기를 새로 세우는 과정이 우리 시대의 성 문제의 한 향방을 가리킨다.
작가의 한층 높은 정진을 기대하며 수상작으로 삼는다.
심사위원= 이제하 윤흥길 최원식
제3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요약
▲심사경위
하성란.심상대.윤성희등 8편 본심에
제33회 한국일보문학상은 1999년 10월부터 2000년 9월까지 국내 16개 월간ㆍ격월간ㆍ계간 문예지에 발표된 작가들의 단편 및 중편소설 310편을 심사대상으로 했다. 심사위원들은 이외에도 단행본으로 발표된 작품집 및 장편도 대상으로 삼았다.
예심위원으로 위촉된 문학평론가 정호웅(홍익대교수) 우찬제(서강대교수) 신수정씨는 10월26일 10편 내외의 작품을 추천, 중복추천된 작품들을 우선 통과시키고 나머지 작품 중에서 토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8편을 본심 추천작으로 선정했다.
8편은 서하진의 '邪心(사심)', 심상대의 '美(미)', 윤성희의 '모자', 이윤기의 '울도 담도 없는 집', 정영문의 '회저의 시간', 조경란의 '망원경', 최수철의 '아우라1-환각에의 초대', 하성란의 '기쁘다 구주 오셨네'였다.
본심위원 이제하(소설가) 윤흥길(소설가ㆍ한서대교수) 최원식(평론가ㆍ인하대교수)씨는 11월 7일 한국일보사에서 심사위원회를 열고 8편의 작품에 대해 오랜 토론을 거쳐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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