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는 2000년 12월 현재 1,064명(통일부 집계, 해외 거주자 218명). 북한 식량난이 심각했던 94년부터 급증한 탈북자 수는 지난해에는 100여명에 육박했다.이에 따라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는 탈북자들이 있는 반면 실패하는 경우도 잦다. 성공적으로 남한 사회에 적응한 탈북자 두 사람이 만나 자본주의 사회 적응 방법과 고생담을 이야기했다.
■최세웅
1960년 평양에서 북한 노동당 재정경리부장(장관급)을 역임한 최희벽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종합대학(독문과)을 졸업, 북한 외화벌이 전담업체인 대성경제연합회사 영국지사장을 역임하는 등 8년간 서유럽에서 북한 국제금융전문가로 활동했다.
95년 12월 만수대무용단 무용수였던 부인 신영희씨, 두 자녀와 귀순했다. 1월 8일 외환중개전문회사 엔포렉스를 창업했다.
■이애란
196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신의주경공업대학 식료공학부를 나와 94년까지 양강도 혜산의 맥주공장 감독원 등으로 근무했다.
97년 10월 아들과 함께 탈북했다. 99년 삼성생명 생활설계사로 입문, 전국 6만명의 설계사 중 15위를 차지할 만큼 우수한 실적을 올렸다. 지난해 말 서울 사당동에 토끼요리 전문점인 '씀바귀네'를 열었다.
-두 분의 남한생활이 몇 년째죠?
▦최세웅 = 1995년 12월 12일에 왔으니 5년이 조금 넘었네요.
▦이애란 = 저는 3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97년 10월 19일에 아들과 함께 왔고 그 해 12월 12일에 부모님 등 나머지 가족들이 ?戮윱求?. -요즘 생활은 어떻습니까?
▦최세웅 = 저는 다른 성공한 탈북자들처럼 '진달래각'이라는 냉면 전문 북한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다른 할 일이 없어서 다들 음식점을 하는 것이지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정부 정착금 4,000만원을 받았고 또 아내가 뮤지컬 출연료로 5,000만원을 받아 그걸로 대방동에 22평 아파트를 얻었습니다.
첫 직장(한국금융결제원)에서 연봉 2,800만원을 주더군요. 런던에서 외환중개회사를 운영했던 능력을 인정받아 나라종금으로 옮겼더니 연봉 1억원을 주더라구요.
그래서 1년 만에 집을 샀고 IMF 위기 때 가게가 싸게 나와 장사를 해야겠다고 맘먹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을 때 옥류관 지점인 평양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주방 할머니한테 냉면 만드는 법을 배웠거든요.
그것만 믿고 냉면가게를 하기로 결심한 거죠. 음식점은 그럭저럭 잘 됩니다. 최근에는 전공을 살려서 외환중개 전문회사를 창업하고 환전 및 외환중개 사이트(www.n_forex.com)도 개설했습니다.
▦이애란 = 저는 정착금을 1,800만원 받았습니다. 그걸로 임대아파트 얻고 나니까 800만원 남더라구요. 그래서 어떡하든 직장을 구해야겠다고 뛰어다녔습니다.
첫 직장이 호텔 룸메이드였는데 월급 50만원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한 달에 350만원 준다기에 귀가 솔깃해서 찾아갔는데 피라미드 회사더군요.
1년 정도를 직장만 구하다가 누군가 삼성생명 생활설계사를 권해 찾아갔고 시험도 통과했습니다. 근데 주변에서 모두 말리는 거예요.
"보험은 연고가 있어야 하는데 네가 무슨 재주로 파느냐, 안 좋은 일도 당할 수 있다"면서요. 그래도 딱히 할 일이 없어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뛰어 다녔는데 정말 잘 안되더군요. '남한에는 북한과 같은 조직은 없지만 연고주의가 참 강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임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는 전도사가 소개해준 성경모임에 참석했지요. 가족처럼 잘 해주며 보험에 가입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실적도 늘어나고 요령이 생겨 한때는 월급 2,00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공부한 것이 발효공학이어서 먹는 사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건강식품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북한에서 자주 먹던 토끼로 '애란곰'요리를 개발해 식당을 낸 지 석 달 됐습니다.
-생활하면서 어려웠던 것은 없었나요?
▦이애란 =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죠. 이방인이나 야만인 취급을 하니까요. 모 공단에 취직하려고 했는데 탈북자라서 안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유달리 배타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 제가 11살까지 평양에서 살다가 월남자 가족이라는 것이 발각돼서 백두산 밑의 삼수라는 곳으로 쫓겨났는데 그곳에서도 배타성을 경험했습니다.
또 하나, 자본주의 사회라서 효율적인 시스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요. 삼성생명에서 매일 아침 1시간30분 동안 조회를 합니다.
북한에서도 조회는 5분이면 끝나는데요. 설계사에게는 오전 9~10시가 사람들 만나기에 좋은 시간이어서 여러 번 건의를 했는데 고쳐지질 않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조회를 많이 빠졌습니다.
▦최세웅 = 혹 그것 때문에 밉보이진 않았나요.
▦이애란 = 그래도 실적이 좋으니까 별 말 없었습니다.(웃음)
▦최세웅 = 저는 22살부터 외국생활을 했고 런던에서도 적응을 잘 해 남한에 올 때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적응이 쉽지 않았어요.
제가 여기 와서 제일 어려웠던 것은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과의 관계입니다. 한번은 한겨울 내내 냉면 만드는 법을 가르쳤던 주방장이 "옆 가게에서 150만원 주겠다고 했다"며 월급을 올려달라는 겁니다.
제가 "130만원 밖에 줄 수 없다"고 하니까 옆 가게로 옮기면서 저를 부당해고로 고발해버렸습니다. 잘못된 고발인데도 우리나라 노동법은 이를 제지할 수단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힘들더라구요. 또 하나, 이애란씨가 말한 시스템에 관한 것인데요, 이 나라에서는 무슨 일을 하려면 관계자랑 술 먹어야지 뒷돈 줘야지, 그런 것도 참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으로 북한에 개혁ㆍ개방이 시작될 것 같은데요. 북한 사람들이 잘 적응할 것 같습니까.
▦이애란 = 북한도 이미 87년 사람들을 옥죄던 조직이 느슨해졌습니다. 제가 살던 혜산은 중국과의 국경지대여서 87년부터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전원(경찰)에게 들키면 붙잡혀가는데도 말이지요. 저도 94년부터 장사를 했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러닝셔츠를 70원에 사서 황해도 해주로 가 140원에 팔고 거기서 다시 해삼 같은 해산물을 사서 중국에 파는 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해주 가는 기차는 장사꾼들로 가득 찰 정도였습니다. 정책적으로도 이런 것을 묵인합니다.
93년부터 식량휴가라고 해서 250원을 공장에 내면 10일 동안 안 나가도 되는데 보통 500원을 내고 20일 동안 장사를 했습니다. 북한에는 지금 사채시장도 있고 거간꾼(중개인)도 있습니다.
▦최세웅 = 87년에 노인들이 아침 시장에서 싸게 야채를 사서 집에서 다듬은 후 저녁때 퇴근자들에게 비싸게 파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불법이지만요.
73년 기관 독립채산제에 이어 89년 일반인 독립채산제가 시행돼 북한 에는 이미 자본주의 요소가 팽배해 있습니다.
90년대 초반 북한에서는 '직장다니는 사람이 제일 머저리, 돼지키우는 사람이 두번째, 두부장사가 세번째 머저리'라는 농담이 유행했지요.
그만큼 직장 그만두고 장사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니까요. 저는 개혁ㆍ개방은 당연히 될 것이고 '어떤' 개혁ㆍ개방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북한주민이 수용할 속도로 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개혁ㆍ개방이 급격하면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보다 더 개인주의적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애란 = 제가 생각할 때도 제가 남한사람들보다 더 소유욕이 강한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하도 '뭐 주겠다, 곧 뭔가 이루겠다'는 말에 많이 속아 내 주머니 속에 뭔가 넣어둬야 안심하거든요.
96년 4월에 혜산의 우리 집에 암달러상이 안전원에 쫓겨 도망왔습니다. 옆집 아줌마가 보고 있다가 안전원들을 따돌리고 우리집에 와서는 암달러상에게 자기가 안전원을 따돌려서 구해줬으니까 '말값'을 달라는 겁니다. 북한 사람들이 장사를 하게 되면서 각박해졌어요.
▦최세웅 = 러시아 개방할 때나 비슷하지요, 뭐. -적응못하는 탈북자들에게 해줄 말이 있나요.
▦최세웅 = 남들 얘기에 섣부르게 승낙하지 말고 듣기만 하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다른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어 본 다음에 결정하라구요.
남한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북한에서의 지위 같은 것은 다 잊어버리고 새로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살아야지요.
▦이애란 = '내가 북한에서는 뭐였는데'하는 생각은 절대해서는 안돼요. 또 너무 조급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몸으로 이거저거 많이 경험해봐야 합니다. 직장에 들어가 몸으로 때우며 노력하다보면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노향란 기자
ranhr@hk.co.kr
김기철 기자
kim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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