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19일 친구가 죽었다. 마치 날이라도 정한 것처럼 죽었다. 살림이 어려웠지만 지적 호기심이 많던 친구였다. 친구의 자취방에서 두툼한 원고뭉치를 발견했다. 이탈리아 역사가 베네디토 크로체의 독일어판 저서였다.번역을 마치지 못한 그 책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1992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최윤씨의 '회색 눈사람'은 이런 친구에 대한 기억이 소품으로 차용되었다.
소설은 그러나 죽은 친구에 대한 헌사였다기 보다는 그 시대, 이름 없이 살다간 수많은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1970, 80년대의 소위 '운동권'인 우리.
'우리'라고 말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던 아주 작고 사소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 시절 우리-왜 나는 우리라는 단어 앞에서 여전히 수줍고 불편함을 겪는가-는 모두 넷이었다. 물론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가 아니었다.
그들을 알았던 많은 사람들은 나의 이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에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감히, 그들의 견해와는 무관하게 이 단어를 쓰기로 한다.' ('회색 눈사람' 중)
"1970년대부터 80년대 많은 젊은이들의 의식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어떤 운동의 핵을 이루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일을 만들어 갔지만, 그보다 많은 일은 주변의 참여자들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주도적인 영웅이 아닌 주변인에 의해 이뤄진 역사, 역사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1970, 80년대 운동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던 90년대에 그런 물음들을 던지고 싶었다."
인쇄소에서 금서의 교정을 보거나 수입불가인 외국책을 번역하는, 주변부 일을 했던 강하원의 이름이 제대로 호명되는가 하면, 운동권의 핵심 인물이라 할 '안'은 그저 '안'으로 불려질 뿐 제대로 된 이름이 없다. 그것은 '영웅'에 대한 최윤 방식의 뒤집기이다.
평론가이자 번역가, 소설가인 최윤씨는 지금 서강대 불문과 교수로 인문관의 연구실에서 학생들을 만난다. 교지를 편집하면서 인쇄소를 들락거리던 대학시절이 30년 지났고, 이제 그는 교지를 만드는 후배들로부터 '그 시절'을 취재당하기도 한다.
그는 여전히 주변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브레히트는 말했다. 민중의 노래는 시인이 작곡을 해서가 아니라 일반인에 의해 불릴 때 비로소 노래가 된다고."
작가가 주인공인 사람의 틀을 축조한다고 가정할 때, 그의 축조술은 언제나 '우리'를 지향하고 있었다. 소설 속 강하원은 버림 받는 것에 익숙하다.
엄마로부터 버림 받았고, '안'의 친절도 의심스럽다. 강하원에게 '미국 가는 여권'이 없었다면 과연 '안'은 그를 '그들의 일'에 가담시켰을까.
'(정은) 내가 인쇄소에서 그들과 일하기 전부터 안이 나의 여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회색 눈사람'중)
"정당하고 아름다운 사건에는 크고 작은 이물질이 있게 마련이다. '안'이 강하원을 어쩌면 '이용'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질 수 있었던 김희진과의 우정, '우리'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저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대학 때 서강대 뒷편의 허름한 자취방에 죽은 그 친구가 살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 것도 없는 그 친구 집으로 몰려 가곤 했는데, 불꺼진 자취방에 들어가 그 친구는 다리미를 책으로 척 받치고 식빵을 구워 주었다. 그렇게 구운 토스트가 성찬이었던 시절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나의 소설이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말한다. 공동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그저 공유라고 하면 어떨까.
같이 모여 고무줄 놀이를 하고 공기 놀이를 할 때의 그 어릴 적 즐거움을 아직 잊지 못한다. 뜻이 비슷한 이들끼리의 유대, 그것은 단순한 유아적 기쁨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상적 사회에 대한 열망,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이 1970년대, 혹은 80년대의 '우리'를 만들었다면 2000년대에는 유희와 기호가 '우리'를 만드는 시대이다.
그는 "그런 재미없는 일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표한다. 이상과 정열이 유희와 쾌락으로 대치된 시절이지만, 그는 '우리'에 대한 희망은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다.
그 시절, 동네 아이들이 연탄재와 섞인 회색 눈으로 만든 눈사람에 '안'이 주었던 목도리를 둘러 주었듯이,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눈사람 하나를 만들 듯이 말이다.
인쇄소에서 은밀한 일에 가담하게 된 나는...
●줄거리
거의 20년 전의 그 시기가 내 눈앞에 무대처럼 환희 떠오른 것은 도서관에서 발견한 짧은 기사 때문이다. 뉴욕 하이드파크에서 강하원이라는 이름의 여권을 가진 여성 불법체류자가 쇠약해져 아사했다는 내용이다.
그시절, 우리는 모두 넷이었다. 나는 지난 학기 책을 팔아 다음학기의 교재를 구입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였는데 금서인 알렉세이 아스타체프의 '폭력적 시학:무명 아나키스트의 전기'를 인쇄소 주인 '안'에기 팔았고, 그의 권유로 인쇄소일을 하게 됐다.
이모 집에서 도망쳐 나온 내게 인쇄소의 기계적인 일은 큰 위안이 되었다. 늦은 밤 우연히 인쇄소에 '안'과 다른 두 남자 두 사람이 모여서 은밀한 일을 하고 있음을 알게된 나는 가끔 버릇처럼 그곳을 찾았다.
"그래 그사이 뭣 좀 알아냈습니까?" '안'은 비밀을 알아버린 나를 해고하는 대신 밤에 인쇄소 일을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기 책속에 넣은 채 잃어버렸던 어머니의 초청장을 잘 간수하라고 전해 주었다. 미국인 운전병을 따라간 어머니가 보내준 초청장을 받은 나는 여권을 신청했다.
인쇄소에서 교정 일을 하면서 나는 형사들이 잡으러 오지 않을까 조바심 냈고, 그만큼 또 은밀하게 '안'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잠자는 나의 여윈 뺨을 한번 만져준 적이 있다. 어느날 인쇄소에 경찰이 들이 닥쳤으나, '안'과 '정'은 검거되지 않았다.
며칠 뒤 너무나 쇠약한 몸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은 김희진이라는 여자였다. 그는 '안'의 편지를 내놓았다.
내가 가진 여권을 그에게 주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그는 나의 여권을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강양, 고맙소."
그가 떠나고 '안'으로부터 이런 편지가 온 것이 끝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민중 예술가이자 운동가가 되었고, 나는 인쇄소에서 압수당한 미완성 번역본을 다시 적어 그에게 전했다.
나는 낙향한 한 교수의 자료 정리를 위해 일주일에 한번 서울에 들른다. 이번 겨울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비어있는 들판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 볼까.
며칠전에 지구를 떠난 그녀의 별에 전파가 닿게끔 머리가 긴 가지로 안테나도 꽂고...,
인쇄소에서 은밀한 일에 가담하게 된 나는...
●약력
▲1953년 서울출생. 본명 현무
▲서강대 국문과 졸업. 프랑스 엑상프로방스대 박사
▲파리 국립동양학 대학교 한국학과 초빙교수, 현재 서강대 불문과 교수
1978년 첫 평론 '소설의 의미구조분석' 발표
▲1988년 중편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발표
▲장편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1991) '겨울, 아틀란티스'(1996)
▲작품집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92) '속삭임',속삭임(1994) '숲속의 빈터'(1999)'열세가지 이름의 꽃 향기'(1999) 산문집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1994)등
▲동인 문학상)1992) 이상문학상(1994) 대산문학상 번역부문(1994) 한국펜문학상(1997) 한국번역가협회 대상(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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