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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 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돼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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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 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돼지(2)

입력
2002.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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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되돌아나갈 때쯤 기석을 비롯해 열 명 정도가 병수 집 마당에 모였다. 모닥불 위로 원을 그리며 나란히 펴진 손등들이 마치 거북이 등을 한 겹 씌워놓은 것처럼 두껍고 검었다. 일년 농사를 끝내고 설이 되면 서울에서 내려오는 자식이나 동생들을 위해 돼지를 잡아 나누는 것이 그들의 몇 안 되는 기쁨 중에 하나였다. 특히 오늘 잡을 병수집 돼지는 새끼를 낳은 적이 없고 사료가 아닌 음식찌꺼기를 먹여 키웠기 때문에 고기 욕심들을 내고 있었다.하지만 병수는 이번 설이 반갑지가 않았다. 어머니가 짐을 싸들고 경로당으로 갈 때에 병수는 어머니 뒤통수에 대고, 다시 집에 들어오면 불 싸지른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병수는 어머니를 그렇게 내친 것보다 그 행위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자신의 내부를 바라볼 때 경멸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때는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피가 끓어올랐다. 병수는 몇 년 동안 농사 짓고 품팔아 번 돈을 전부 투자해 비닐 하우스를 짓고, 설 대목을 노려 시금치를 심었다. 파란 시금치 싹이 올라오는 만큼 기울어지는 집 걱정이 덜어졌다. 이번 설만 그럭저럭 지내면 내년 추석에는 새 집에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금치를 뽑기 며칠 앞두고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병수는 그날 저녁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늦게 돌아와 곤히 잠이 들었다.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어 있기는 했으나 눈은 내리지 않았다. 설령 눈이 내렸다 하더라도 철제 구조물로 된 비닐하우스가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밤새 내린 눈이 소음까지도 삼켜버렸는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곤한 잠을 잤다. 그 달콤한 잠을 깨운 것은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비명 같은 소리였다.

“얘가 뭐하는 거야? 빨리 나오지 않고.”

병수는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어머니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밖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병수가 고개를 들었을 때 담 너머로 늘 보이던 비닐하우스 지붕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건너편 산이며 아랫집 지붕에 쌓인 눈이 눈부시게 보일 뿐이었다.

“비닐하우스가….”

어머니가 병수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병수는 마루를 내려와 신발을 꿰어 신었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파도처럼 쓰러진 비닐하우스가 눈앞에 들어왔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마당 끝까지 걸어갔지만 밭 쪽으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비닐하우스와 병수 사이에 깊은 장애물이 생겨 영원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았다.

“시작혀. 해 넘어가.”

기석이 넋 나간듯 서 있는 병수를 향해 말했다. 병수는 비닐 한 장을 들고 돼지우리 쪽으로 갔다. 마당가에 있는 돼지우리 앞에 토방 같은 공간이 있고 그 공간과 밭 경계에 눈 녹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었다. 병수는 돼지우리 앞에 비닐을 깔고 도끼를 집어들었다. 그때 좁은 길로 두 대의 승용차가 들어왔다. 뒤따라오는 검정색 그랜저는 멀리서 보아도 석진의 차라는 것을 알겠는데, 가까이 와 있는 흰색 소나타는 처음 보는 차였다. 소나타는 엉금엉금 기어 병수 집 밭머리에 멈춰 서더니 고운 양장을 차려입은 상현의 어머니와 상현이 내렸다.

상현은 병수와 중학교까지 함께 다닌 동창생이었다. 병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몇 년 동안 공장에 다녔지만 상현은 공부를 계속했다. 같이 공동묘지에서 축구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들은 서로가 너무 다른 길 위에 서 있었다. 병수는 며칠 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상현을 본 적이 있었다. 아홉시 뉴스였는데 상현은 농가부채 실무 과장이라고 소개되고 있었다. 소파에 몸을 묻고 앉아 있는 상현의 모습은 낯설어 보였다. 상현은 농가부채 문제는 농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부안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병수는 뉴스가 끝나자마자 동창의 출세에 대한 기쁨이나 질투 같은 감정보다는 정부의 정책을 수립하는 실무과장이라는 관료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병수는 지금까지 빚지지 않고 사는 것을 신념으로 삼아왔다. 몇 년 전 농협에서 주택자금을 얻어 집을 수리하라는 것을 거절한 이유도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탕감이라니.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뭐하는 거야. 불만 쬐고 있네.”

상현의 어머니가 돼지 우리를 바라보며 언짢은 소리를 했다.

“아주머님, 서울루 지사지내러 가는 모양이유.”

제일 앞쪽에 있던 종만이 먼저 인사를 했다.

“우리 애가 데릴러 왔어. 고기 좀 사갈라고.”

축축히 젖은 땅을 피해 뒤따라온 상현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허리를 세 번이나 숙였다. 마치 선거 직전에 방문한 국회의원을 보는 듯했다. 병수는 앞으로 걸어가 상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현은 병수의 손을 잡으며 다시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나여. 나도 모르것남.”

상현은 그쯤에서야 병수를 알아보고 멋쩍게 웃으며 ‘병수구나’라고 말했다. 민망해진 병수는 시선을 거둬들여 밭 끝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뒤따라온 승용차가 멈춰서면서 석진이 내렸다. 병수는 석진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철거된 비닐하우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날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비닐하우스의 철제 빔은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휘어져 있었다. 병수는 손 댈 엄두가 나지 않았고 대고 싶지도 않았다. 무관심한 척 버려 두고 구판장으로 달려갔다. 마침 기석과 몇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대화는 폭설과 농사에 대한 푸념에서 부채 탕감, 상현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병수는 관심 없는 척 술만 마셨다.

그런데 하필 그때 농자금 융자를 받아 읍내에 티켓다방을 차려 돈을 번 석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석진은 병수를 보자마자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으면 참았을 텐데 그날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멱살을 잡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리지만 않았어도 선배고 뭐고 둘 중에 하나는 크게 다쳐야 끝났을 것이다. 간신히 분을 삭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지금 술 처먹고 다닐 때라니?”

어머니는 들고 있던 냄비를 마루에 탁탁 두드리며 언성을 높였다. 다른 집 노인들은 나이가 들면 자식 눈치 본다는데 어머니는 세월이 흐를수록 단련되는 차돌처럼 성질이 고약해져갔다. 스물 여섯에 혼자되어 품팔아 병수 하나를 키워낸 어머니였고,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병수는 어지간한 일은 이해를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몹쓸 피가 자신의 몸 속에 꿈틀거린다는 생각이 들면서 몸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미련한 게 분수를 알아야지 욕심은 있어서…. 내가 비닐하우스 친다고 할 때 알아봤다, 이 미련한 놈아.”

“그럼 나보고 어떡하란 말유…. 어머니가 그러니께 집안이 안 되는기유.”

병수는 수돗물에 손을 씻다 말고 일어나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저 급쌀을 맞을 새끼. 니가 새끼 ?졍袂? 시상 무서운지 모르는디….”

순간 무언가에 눌려 있던 분노가 한꺼번에 튀어올랐다. 병수는 물이 담긴 양동이를 집어 바닥에 팽개쳤다. 어머니가 뛰어나왔고, 아내가 병수의 허리를 잡고 매달렸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가 어머니의 더러운 피 때문이라고, 죽은 외삼촌과 아이를 보고 생각나는 것이 없냐고,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내가 눈치챌까 두려워 입술을 깨물며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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