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무렵 라면 CF를 찍은 적이 있다. 농심이나 청보 라면이었던 것 같은데 이 라면에 얽힌 사연이 하나 있다.군예대 시절 나를 참 아꼈던 임충헌(林忠憲ㆍ현 ㈜한국화장품 대표이사 회장) 상병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가 서울로 휴가를 가면서 나에게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서영춘 리사이틀 공연을 보여준 1961년 무렵이다.
공연을 실컷 보고 난 후 임씨 집에 갔는데 이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라면이란 음식을 먹은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음식이었다.
당시 국산 라면은 전혀 생산되지 않았고 일본 라면만이 수입돼 부잣집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물었다.
“이런 세계적인 음식을 누가 만들 수 있습니까? 집에 요리사가 있나 보죠?” 어쨌든 그 라면 맛은 굉장했고 이후 조금 유명해진 뒤에도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라면을 즐겼다.
그러다 라면 CF를 찍었으니…. 선물로 받은 라면 박스를 집에 갖다 놓고 한동안 하루 세끼를 라면만 먹었다.
이렇게 값싼 라면을 좋아한 나였지만 1980년대 초 나는 이미 ‘밤무대의 황제’가 돼 있었다.
최봉호(崔奉鎬)씨가 서울 퇴계로에서 운영하는 극장식 밤무대 업소인 서울구락부를 시작으로 콜롬비아, 초원의 집, 무랑 루즈, 남태평양 등 5~6개 업소에 출연했다.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깐요”라는 유행어가 퍼진 것도 이때 한 밤무대 업소의 CF를 통해서였다.
수입 또한 대단했다. 최씨가 전속금으로 준 1억원을 은행에 넣었더니 그 한 달 이자만 240만원이었다.
게다가 한 밤업소에서 최소 500만원씩을 받았으니 방송 출연료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어떤 업소는 1년 출연계약만 해주면 1억8,00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내가 1980~81년 2년 연속 납세 1위 연예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밤업소 출연 덕이다. 당시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장미희 구봉서 유지인도 나보다 적게 벌었다.
어쨌든 밤무대 업소는 내 생리에 맞았다. 방송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당시 한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 출연자를 밑에서 올려다봤다가 나중에 큰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방청석에서는 폭소가 터졌는데 왜 나중에 이를 ‘저질’이라고 말하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당시 신문사 기자들도 인터뷰를 하면서 한참 내 칭찬을 하다가는 꼭 “당신 코미디가 저질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라고 말하기 일쑤였다.
밤업소에서는 보통 2시간을 무대에서 보냈다.
말이 2시간이지 웬만한 코미디언은 배겨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내가 이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지방 극장 쇼에서 보조MC로 활약한 경력 때문이다.
주연 배우가 사정이 있어 제 시간에 출연하지 못하면 나 같은 보조MC는 어떻게 하든지 그 빈 시간을 때워야 했다.
그 시절 얘기다.
가수 김추자 쇼를 따라다닌 때였는데 어느날 김추자가 분장실이 지저분하다며 무대에 서기 직전 느닷없이 나가버렸다.
단장이 겨우 설득해 2시간 후 돌아오기로 하고 대신 내가 무대에 섰다. 어떻게 2시간을 때워야 하나.
서영춘의 유명 레퍼토리인 ‘인천 앞 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곱부(컵)가 없으면, 뿜빠라라밤 뿜빤빰, 뿜뿜…’을 시작했다.
‘뿜빠라라밤 뿜빤빰’이라는 후렴구를 무려 30분 동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관객에게 수도 없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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