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박종환(朴鍾煥) 감독과는 좋은 일을 두 번 했다.하나는 잔디구장 건립기금으로 대한축구협회에 1,000만원을 기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교인 춘천고 축구부를 10여년 만에 부활시킨 것이다. 모두 1983년에 일어난 일이다.
그 해 6월 우리는 저마다 금의환향했다.
21일에는 박 감독이 청소년축구 4강 신화를 이룬 후 귀국했고, 그 전날인 20일에는 내가 성공적인 미국ㆍ캐나다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한국축구를 위해 뭔가 도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박 감독이 귀국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축구가 세계정상에 오르려면 개인기를 개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잔디구장에서 마음껏 뛰어야 한다.”
나는 곧바로 박 감독에게 1,000만원을 기탁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23일 오후 우리는 한국일보사 3층에서 만났다.
“이 돈을 최순영(崔淳永) 대한축구협회장에게 전해달라”고 하자 박 감독이 눈물을 글썽였다.
“주일이가 한국축구를 도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돼 기쁘다”고도 했다.
어쨌든 이 일을 계기로 그 해 효창운동장에는 축구전용 인조잔디가 깔렸고, 우리가 춘천고 31회 동기생이라는 사실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다음에 한 일은 춘천고 축구부 부활이었다.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춘천고 축구부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잠 못 들게 했다.
문제는 돈. 그 해 여름 춘천 시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춘천고 축구부 부활기금 마련을 위한 연예인축구대회’는 이렇게해서 탄생했다.
물론 이때 동원된 이덕화 이상해 임채무 석 현 등은 내가 1982년부터 단장 직을 맡았던 무궁화축구단 소속 연예인들이었다.
박 감독도 열심히 이 일을 거들었다. 직접 춘천까지 내려가 길거리를 일일이 돌며 표를 팔 정도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한국 최고의 스타였던 박종환 감독이 표를 파는데 안 살 사람이 있나. 한 경기를 끝내니 순식간에 2,000만원이 모였다. 이 돈으로 춘천고 축구부가 부활된 것은 물론이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음해 4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LA올림픽 축구 아시아지역 2차 예선에서 박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축구팀이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나는 그때 자비로 연예인 몇 명을 이끌고 스탠드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원정응원까지 펼쳤던 터라 허탈함은 더 했다.
우리는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고민하는 박 감독을 곁에서 볼 수가 없었다.
“야, 감독 생활 때려 쳐라. 내가 보기에 그거 계속하다가는 제 명에 못살겠다. 연예인도 스트레스가 심하지만 너 사는 게 어디 사람 사는 거냐?”
박 감독은 아무 말 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박 감독은 서울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술을 무지 마셨다.
고등학교 때 싸운 친구와는 지금도 말을 안 할 정도로 독하기 이를 데 없는 그도 기댈 데가 없었던 모양이다.
양주를 아예 물잔에 따라 마시곤 했다. 그 이후 ‘박종환 축구 문제 있다’라는 기사가 나온 날은 나와 박 감독은 밤새 술을 퍼먹었다.
내가 서울 상계동 단칸방에서 살 때 집사람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쌀 가마와 미역 다발을 사 들고 찾아온 박 감독, 지금도 1주일에 한번씩은 몸에 좋다는 지역 특산물을 갖고 분당 집으로 찾아오는 박 감독.
그는 나의 진정한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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