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도착했다. 1992년 2월13일 밤이었다. 출국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홍콩 공항에서 시내로 빠져나갈 때도 어떻게 나갔는지 몰랐다. 그만큼 감시와 보호가 심했다.그들은 우리 가족을 샹젤리제 호텔 스위트 룸에 묵게 하고는 그야말로 VIP 대접을 했다. 그러나 쇼핑도, 관광도 일체 할 수 없는 신세였다.
다음날 저녁 한국식당에서 한국신문을 봤다. ‘이주일씨 돌연 출국, 억측 무성’이라는 큰 제목 하에 별의별 이야기가 다 씌어 있었다. “휴가차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며, 사흘쯤 홍콩에 머물다 미국을 거쳐 5월에 돌아오겠다”라는 내가 하지도 않은 말까지 실렸다. “정부와 여당이 이주일씨를 사실상 강제 출국시켰다”는 내용의 국민당 성명서도 보였다.
나는 그제서야 내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체 윤곽이 잡혔다. 일개 연예인인 나를 중심으로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러다가 내가 진짜로 출마를 하지 않으면 국민당은 치명타를 입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는 결국 정주영(鄭周永) 대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아닌가.
그때부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살겠다고 홍콩으로 온 내가 측은하기까지 했다. 한 가족을 수십 일 동안 떨게 한 권력에 대한 반발심도 생겼다.
그러자 오기가 생겼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진짜 정치란 걸 해봐? 그 순간 출마를 권유했던 구리 지역 사람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홍콩 강제출국이 오히려 나의 정치입문 결심을 굳힌 셈이다.
이쯤에서 당시 홍콩 현지에서 나를 취재했던 신문사 특파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홍콩에 오고 나서는 어렴풋이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그들에게는 “연예인으로 남고 싶다”고 극구 부인했던 것이다. “위협을 느낄 상황이 전혀 없었다” 며 외압 사실까지 숨겼다. 이해해 달라. 나는 그때 너무 두려웠다.
홍콩에 머문 지 3일째 되는 날, 마침내 국민당에서 사람을 보냈다. 현대그룹의 홍콩 현지 직원을 총동원해 내 숙소를 알아낸 것이다. 나를 찾아온 사람은 당시 국민당 용산지구당 위원장이었던 봉두완(奉斗玩) 전 의원이었다. 과거 방송사에서 몇 차례 인사를 나눴던 봉 의원은 그날 밤 기관원 몰래 바닷가 모텔로 나를 불러냈다.
“이주일씨, 출마 하세요. 안 그러면 정말 죽습니다.” 그리고는 당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봉 의원 특유의 달변이 이어졌다. 이상하게 그가 하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정 대표와 통화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로 안부를 묻는 정 대표에게 “뭘 믿고 제가 출마할 수 있겠습니까? 제 업소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정중하게 물었다.
정 대표는 역시 손이 컸다. “미국에 일단 가라. 그러면 네 앞으로 20만 달러(2억 6,000만원)를 준비해놓겠다.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테니, 일단 미국을 갔다 오라.” 비로소 안심이 됐다.
출마를 결심했다. “내일 당장 한국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전까지의 두려움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남자가 태어나서 한번 해볼만한 일이다, 나라고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음날 새벽, 기관원에게 부탁했다. “제가 아들이 죽은 후 심장병이 생겼는데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습니다. 제발 귀국해서 치료 좀 받게 해주십시오. 출마는 절대 안 합니다.” 몇 시간 후 나는 한국행 케세이 퍼시픽 420편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2월17일 저녁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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