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 이주일(41)너무 일찍 찾아 온 회의
알림

[나의 이력서] 이주일(41)너무 일찍 찾아 온 회의

입력
2002.05.13 00:00
0 0

14대 국회 개원전인 5월말부터 국민당 주변에서는 몇몇 의원들의 탈당설이 흘러나왔다.조윤형(趙尹衡) 최고위원은 민자당 입당설까지 나왔고 양순직(楊淳稙) 고문과 내 이름도 거론됐다. 6월1일 조 최고위원은 국민당을 탈당, 얼마 후 친정인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러나 나는 탈당 정도의 차원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이미 의원직을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 최고위원이 탈당을 한 그날 새벽, 정주영(鄭周永) 대표 손에 이끌려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마음은 떠나 있었다.

의원이 된 데 대한 기쁨보다는 실망과 환멸이 더 컸던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들 만나는 게 괴로웠다. 지역구에서 무슨 돌잔치가 열려도 불려가야 했다.

내가 “바빠서 도저히 못 가겠다”고 하면 “내가 찍어줬는데 국회의원 되니까 안면을 바꾼다”며 괴롭혔다.

회갑, 상가, 결혼식 등 하루에 20여 차례나 뛰었다. 봉투에 5만원을 담아 건네주면 “지구당 운영비에 보태 쓰라”며 내게 되돌려주기 일쑤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돈이 너무 적다는 뜻이었다.

특히 장례식이 괴로웠다. 상주들은 무조건 내가 밤을 새워주길 원했다. 술까지 계속 먹이면서 괴롭혔다.

그들은 나를 국회의원이 아니라 여전히 코미디언 이주일로 본 것이다.

“당에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른 국회의원이었어도 그들이 나를 그렇게 대했을까.

다른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선 후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국민당 동료 의원들의 당선사례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문제는 그들도 나를 동등한 국회의원이 아니라 행사를 빛낼 연예인으로 대한 것이었다. 참으로 참기 힘들었다.

연예계 생활보다 더욱 바빴다. 그것도 의정활동이 아니라 남 뒤치다꺼리로 말이다. 그렇다고 연예인 때보다 돈을 더 벌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지구당 관리에는 진짜 많은 돈이 들어갔다.

한 달 운영비만 1,500만원에서 2,000만원. 4년이면 무려 10억원에 달하는 큰 돈이다. 술집도 안 하는 상태에서 돈 나올 곳이라고는 의원 세비 500여 만원밖에 없었다.

더욱이 중앙당에서는 거의 돈 한푼 지원하지 않았다. 대선후보로 나선 정 대표가 오로지 ‘현대 맨’만 동원할 뿐, 지구당에는 돈을 전혀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 대표가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지구당 위원장들이 선거운동기간 중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나를 더욱 참담케 한 것은 그 해 10월 국정감사가 열리기 전까지 변변한 의정활동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사실이었다.

개원 전부터 상임위 속기록, 국회법, 예산회계법 등을 열심히 공부한 나로서는 정말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 사이 내가 의사당 본회의실에 들어가본 것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6월29일 개원한 제157회 임시국회는 국회의장단을 선출한 뒤 곧바로 휴회했고, 8월1일 민자당이 단독 소집한 제158회 임시국회 역시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곧바로 산회한 것이다.

나는 초조해졌다. 동료 의원들의 푸대접과 괄시는 더욱 심해졌다.

5월 LA 흑인폭동 직후 재미동포 위문공연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황영조(黃永祚) 선수에게 2,000만원을 줬을 때 욕만 바가지로 먹었다.

“잘난 체는 자기 혼자 다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국회의원이 됐을까? 마음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갔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