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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47)난 이렇게 돈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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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47)난 이렇게 돈을 모았다

입력
2002.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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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4월6일 내가 전재산 52억원을 공개했을 때 주위에서는 말이 많았다.국민당에서 정몽준(鄭夢準) 의원 다음으로 재산이 많은 것에 사람들이 놀란 것이다. 내가 아무리 “새벽까지 술 마시며 남 웃겨 모은 돈”이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분명히 부동산 투기다, 탈세다 해서 돈을 모은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이참에 내가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분명히 이야기해야겠다.

아니 돈이란 놈이 어떻게 알았는지 나만 찾아서 떼굴떼굴 굴러 들어오던 때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러다 웬 젊은 놈에게 사기를 당해서 5억원을 날린 이야기이며, 그 놈을 잡으려고 중국을 헤집고 다닌 이야기까지 하겠다.

2, 3회 정도 계속될 이 이야기만큼은 진짜 믿어달라.

내가 돈을 번 기간은 TV 데뷔 해인 1981년부터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까지였다. 올림픽을 전후로 조금씩 수입이 줄어들 때까지 그 7, 8년 동안 엄청 벌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 돈다발이 수북하게 쌓여있을 정도였다. 재산신고 때 밝힌 52억원은 이때 다 벌었다.

조용필(趙容弼)을 제치고 5년 연속 연예인 소득순위 1위에 오른 것도, 성실납세자로 인정을 받아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것도 이때다.

수입원은 밤업소, 영화사, CF 광고주, 지방 밤무대였다. 영화 계약료와 지방 밤무대 출연료가 들어오는 날에는 하루에 1억원 가까이 들어왔다.

수천 만원은 돈으로도 안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 양복을 입다 보면 안주머니에 수십 만원이 들어있는 것은 기본.

내 성격상 흥청망청 돈을 쓴 것은 아니지만 워낙 돈이 많이 들어온 탓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사과궤짝에 담긴 돈을 받아봤다. 정치인들이 돈을 사과궤짝에 담아 나르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아마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과궤짝만큼 만원짜리 지폐를 차곡차곡 담기에 좋은 것은 없다. 더욱이 당시에는 수표를 거의 사용하지 않던 때라 지방에서 돈이 올라올 때에는 꼭 사과궤짝을 썼다. 잘만 담으면 2억~3억원은 충분히 들어간다.

나는 이 돈을 장롱에 모았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던 조그만 장롱이었는데 어찌나 낡았는지 주먹으로 치면 금세 부서질 것 같았다.

그래도 아침 저녁 보기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복덩이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은행과는 전혀 거래를 안 했다.

무명시절 은행에 갈 일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내가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왜 남에게 맡겨?’라는 생각이 더 컸던 것이다.

수입이 늘자 자동차도 바뀌었다. 처음 TV에 출연하고 나서 최봉호(崔奉鎬) 회장이 ‘품위 유지’를 위해 사준 차가 일제 크라운 로얄.

이후 대우에서 나온 수퍼 살롱을 타다가 87년께 벤츠로 바꾸었다. 그러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정주영(鄭周永) 회장의 권유로 현대 그랜저를 탔다.

고급승용차 뒷좌석에 앉아서는 세상이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내가 불과 1, 2년 사이에 이렇게 확 바뀌는 세상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어리석은 것은 나였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자투리땅 200평을 사려다 땅 주인이라고 사기를 친 젊은 놈에게 보기 좋게 당한 것이다.

‘의학박사에 병원장’이라고 소개하던 그 놈을 생각하면 지금도 정신이 버쩍 난다.

1983년 ‘초원의 집’과 ‘무랑루즈’를 운영하던 안병균(安秉鈞) 회장이 내게 평당 400만원짜리 그 대치동 땅을 사라고 권유한 것이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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