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스타 얘기가 나왔으니 옛 스타들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1970년대 중반 내가 극단 MC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던 시절 직접 겪은 사연들이다. 70년대는 극장쇼의 전성기였다.
영화배우 신성일(申星一) 최무룡(崔戊龍), 가수 이미자(李美子) 하춘화(河春花), 코미디언 배삼룡(裵三龍) 이기동(李起東) 등이 TV보다는 극장에서 활약하던 때였다.
76년의 일이었다. 당시 최고 스타인 이미자 하춘화 남 진(南 珍) 문주란(文珠蘭) 등 4명이 한 무대에 서는 초 호화공연이 서울 국도극장에서 열렸다.
‘4인의 리사이틀’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공연은 작곡가 박춘석(朴椿石)씨를 돕기 위한 행사였다.
‘박춘석 사단’이라는 소리를 듣던 이들이 당시 집 한 칸도 없이 전세살이를 하던 스승을 돕기 위해 이례적으로 합동공연을 가진 것이었다.
나는 이 무대에서 영광스럽게도 사회를 봤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누가 어떤 순서로 노래를 부르느냐를 놓고 이들이 공연 시작 시간이 다 됐는데도 티격태격한 것이었다.
당시 스타들은 무대에 가장 늦게 등장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네 사람은 나름대로 자신이 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날레 무대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만큼 옛 스타들은 ‘딴따라’로서 자존심이 대단했다.
가수 하춘화만 해도 지방에 내려가면 공연 시작 2시간 전에 극장에 갔다가 종료 2시간 후에 숙소인 여관으로 돌아갔다.
‘스타는 무대에서만 관객과 만나야지 극장 출입구나 길바닥에서 마주치면 신비감이 없어진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나 역시 바지가 닳아 번들거릴지라도 칼날 같은 주름은 잡았다. 뒷굽이 다 닳은 구두도 얼굴이 비칠만큼 반들반들 닦았다. 일반인 앞에 설 때에는 절대로 복장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선배들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날 스타 네 명의 자존심 대결 때문에 나는 물론 박춘석씨, 공연 제작자인 최봉호(崔奉鎬) 회장은 어쩔 줄 몰랐다.
매니저들 역시 나이 순으로 하자느니, 데뷔 연도 순으로 하자느니 논의만 무성할뿐 아무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공연 시작 1분을 남겨놓고 제비뽑기를 통해 남 진이 오프닝 무대에, 이미자가 피날레 무대에 섰다.
이 정도로 자신의 일과 인기에 애착과 자긍심을 가졌던 그들이 지금도 자랑스럽다.
이후 내가 김추자(金秋子) 쇼에 발탁됐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경남 마산 공연.
이날 낮 공연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새벽부터 극장 앞에 줄을 섰다. 당시 그녀는 뇌쇄적인 율동과 허스키한 음색으로 극장쇼의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톱 스타였다.
마침내 김추자가 도착하고 쇼가 시작됐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안색이 변해갔다.
원래 김추자 공연에는 콤비인 신중현(申重鉉) 악단이 밴드를 맡기로 했었는데 쇼 단장과 문제가 생겨 다른 밴드로 교체됐던 것이다.
더욱이 이 밴드는 김추자가 급히 도착해 리허설도 못하는 바람에 첫 곡부터 죽을 쒔다.
결국 김추자는 몇 곡을 더 부르다가 마이크를 내팽개치고 무대를 내려갔다. 관객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그 내용을 알고서는 표 값을 물어내라고 난리를 쳤다.
쇼는 결국 막대한 손해를 입은 채 1회 공연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다음날 김추자를 만난 단장의 말이 걸작이다.
“멋있었다. 암, 스타는 그렇게 매운 맛이 있어야, 진짜 스타야.” 무조건 팬들 비위만 맞추는 요즘 연예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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