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문학을 하는가. 젊은 문학도였을 때의 나라면 이 질문에 얼굴이 상기되었을 것이다. '문학 한다'는 말에 우쭐해져서 '근데, 내가 하고 있는 게 문학이 맞긴 맞나 보죠?' 하고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나의 천분인 걸요'라고 멋지게 일갈하거나 '그런 질문을 품어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왜냐하면 하는 게 너무 당연하니까'라고 고개를 탁 젖혔을지도 모른다. 왜 아니겠는가. 그 시절 나는 문학 서클을 만들어서 나에게 상을 주고, 쫄면집으로 음악다방으로 몰려다니면서 문학 스터디를 하고, 겨우 막걸리 한 잔을 먹고도 일기장에는 '취한 밤, 사랑한다 문학아'라고 간지럽게 끼적이고, 실연을 하면 새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종로서적에 나가 가장 어려워 보이는 문학이론 책을 사들고 왔었다. 그리고 그런 겉멋은 어린 시절에 이미 터득한 것이었다.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던 나의 장래 희망. 초등학생 때에도 역시 작가였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 하면 어른들을 놀래키고 감탄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지어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선정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읽은 책이 많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가당찮은 현학 취미를 갖고 있는가 하면, 워낙 어린 나이이니 턱없이 법관이나 의사를 꿈꿔볼 만도 하건만 평생 가난한 문학과 더불어 살겠다는 각오와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한번은 해묵은 '어린이' 잡지에서 착하고 가난한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해 고민하다가 천사의 도움을 받아 금빛이 나는 잉크로 소설을 써나가는 멋진 이야기를 읽고 크게 공감했다. 그때 나는 일생 단 한 번뿐이었던 표절에의 유혹을 느꼈지만, 오직 예술가의 자존심으로 그 유혹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이사 때마다 귀찮아 하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묵은 짐 보따리가 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신었다는 엄지손가락만한 손뜨개 털양말, 초등학교 6년간의 통지표와 상장들, 등사판으로 찍은 나의 동시집 등등. 그것은 결혼할 때 어머니가 혼수 속에 챙겨넣어 준 물건들이다. 그 짐 보따리 속에는 열다섯 살에 썼던 나의 첫 소설도 있다. 소년을 화자로 등장시켜 한 가정의 세대 갈등과 파탄을 그린 글인데 주제넘을 만큼 고전적이다. 그 무렵의 나는 '데이비드 커퍼필드' 같은 책 밑에다 '성녀와 마녀'같은 대중 연애 소설을 펴놓고 탐독하곤 했으며, 장차 내가 그 소설 속의 마녀처럼 한 남자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남자들을 잇달아 파멸시킬 것만 같아 고민인 여중생이었다. 고부 관계나 가족 제도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소설을 썼을까. 겉멋이었지 뭐겠는가.
그렇게나 여러 모로 멋을 부렸건만 젊은 시절 나는 작가가 되지 못했다. 시를 여러 편 썼다고는 하지만 단편소설 하나 완성시켜본 적이 없다. 멋은 제법 부려보았으되 절박하게 할말이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글이란 걸 왜 쓰는가.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쓰는 것 아니겠는가. 할 말도 없으면서 입만 멋있게 벌리면 그 다음엔 멋쩍을 일 말고 뭐가 남을까.
당연한 일이지만 정작 나에게 할 말이 생겼을 때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현학취미도 자부심도 그리고 겉멋도. 그러므로 칭찬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전공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천분이라며 잘난 체 하는 일에 미련이 있어서는 더욱 아니었다. 어쨌거나 쓰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쓰라고 하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말이다.
십여 년 전, 나의 어린 딸이 '장래 희망'이라는 제목의 글짓기 숙제를 하다가 불현듯 내게 물었다. 엄마는 장래 희망이 뭐예요? 내가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자 그 애는 내가 장래 희망이라는 말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던지 이렇게 덧붙였다. 아이 참, 꿈 말이에요, 꿈!
꿈을 완전히 잊어버리기야 했겠는가. 여성지의 리라이터로 일하는 동안 한두 번 나는 독자의 이름을 빌린 거짓 수기를 썼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무슨 글이든 완성도를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는 프로 근성을 버리는 일이었다. 훗날 소설 쓸 때 써먹어야 할 멋진 표현들을 써버리지 않도록 내심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자유기고가 시절에도 나는 내가 혹시 최선을 다해버리지나 않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잡문 속에 혼을 담아서는 안 된다, 라고 다짐하곤 했던 것이다. 또한 나는 표현이나 혼만이 아니라 내 이름도 아꼈다. 이제야 말이지만 사실 나에게는 필명이 있었다. 기획회사에 근무할 때 영화사의 일을 몇 가지 맡은 적이 있었는데, 영화를 소설로 각색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미개봉된 외화를 비디오로 수없이 돌려 보면서 그것을 소설로 만드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았다. 그럼에도 글에 관한 한 몸에 배어버린 나의 겉멋과 예술혼이 작동하는 바람에 그저 그런 미국 영화가 한 편의 걸작 소설이 되고 말았는데, 저자의 이름은 김경남, 나의 필명이었다. 별것 아닌 이름을 그렇게 아끼고 아끼다가 나는 나의 진정한 처녀작에 처음으로 내 본명을 붙였던 것이다. 그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작가로서의 명예욕이 강한지 알 수 있는 노릇이다. 문학의 권위에 대해 고지식한 걸로 봤다면 그것도 맞다.
찌 됐든 나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살면서 세상에 대해서 할 말이 생겨났고, 그 말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개인적인 신세 한탄이나 신변잡기일지도 모르는 내 말을 누가 들어주기나 할까 회의적이었고 또 고급 인력이니 만큼 결실의 확신도 없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쓰러 떠났다. 난생 처음 가정과 그리고 소심하기만 한 내 인생을 등지고. 그리고 운좋게도 내 기대보다 3년쯤 일찍 작가가 되었다.
문학도 시절의 나와 진짜 작가가 된 나는 정반대로 글을 쓴다. 젊은 시절 내가 쓰는 글은 되도록 나 자신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하는 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속의 추함과 악의를 일부러 끄집어내 독하게 해부하기를 즐긴다. 또 예전에는 정답을 정해놓고 그곳을 향해 착실하게 나아갔지만 이젠 나 자신조차 모르는 길로 들어서서 모험을 시작한다. 뭔가를 가리켜 보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혼란스러워 하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인생을 좀 아는 사람의 행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도가 언제나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결과가 좋으니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나는 소설가가 되어 행복하다. 소설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보고 내 배짱대로 큰소리도 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가진 치사함이나 모순이나 악의를 인간의 보편성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독자들을 설득하여 못나고 사악한 나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 그 짜릿함이라니! 솔직히 말해 나는 대부분의 자의식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 결혼할 때 어머니가 혼수 속에 넣어준 그 묵은 짐 보따리를 보면서 나는 내 유년이 내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그 물건들을 간직해온 어머니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유년으로 되돌아가 내 선택에 의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니, 소설 속에서나마 다른 모습으로 살아보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꽤 불행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맞다. 어릴 때부터의 꿈이라서. 맞다. 나쁜 상상을 실컷 해보고 싶어서. 맞다. 불행해서. 맞다. 연애 편지를 쓰다 들키면 소설이라고 둘러대려고. 맞다. 가끔 집 떠나고 싶어서. 맞다. 가끔 이 세상에 화가 치밀어서. 맞다. 주위의 권유로. 맞다. 직업이니까. 맞다. 요즘 한국문학은 절망적이라는 말에 기분 나빠서. 맞다. 어느 누가 장래희망을 묻더라도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맞다. 소설을 발표하면 어머니가 무작정 좋아하시니까. 맞다. 때로 삶이 섬뜩한가 하면 어지간히 무력한 게 도무지 몰라서. 맞다. 그럼에도 태연히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는 대체 뭔가 궁금해서. 맞다. 맞다….
■연보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81년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 당선 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장편소설 '새의 선물'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마이너 리그' 등
동서문학상(1997) 이상문학상(1998) 한국소설문학상(2000) 한국일보문학상(2002)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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