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한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그늘에 무력하게 손 놓고 비켜 앉아, 인간의 추악한 이기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들의 야심을 위해 타인을 자기 손안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르려 덤비는 나쁜 사람들과, 그들의 욕망의 파편에 맞아 쓰러지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외롭게 싸우는 착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착한 것에 거부감 세태
요즘 젊은이들은 '착(善)하다'는 말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어의 의미도 시대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문제는 도덕생활의 최고의 이상인 선의 개념이 언제부턴가 왜곡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흔히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신념이 없어 자기 주장을 떳떳이 펴지 못하고 비겁하게 도전을 포기하는 구 세대적 인물을 먼저 생각합니다.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항상 자기 몫을 남에게 빼앗기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다행히 아직은 부모가 자식을 교육시킬 때,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부모들은 한 가닥 회의를 한숨처럼 품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과연 착하게만 살아서 제 밥그릇이나 제대로 챙겨올 수 있을까? 라고 말입니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착한 주인공보다 착한 주인공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표현됩니다.
공지영의 소설 '착한 여자'의 전반부에서 여주인공은 부당한 부모에게 반항 한번 못해보고,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서 공부만 열심히 합니다. 결혼해서는 자신을 죽이고 남편의 부당한 요구에도 순종합니다. 역시 실패가 두려워서 입니다. 임상심리학에서 말하는 '착한 여자 컴플렉스'에 걸려든 것입니다. 윌리암 페즐러는 이를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여자라는 칭찬을 받고 싶어하며, 줄곧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희생하려는 심리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이에 대한 처방은 '나쁜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쁜 여자'란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인생의 주체가 되어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지혜로운 여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충고는 어디까지나 '착한 여자 컴플렉스'라는 병에 걸려있는 환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인류 기본 가치관 위태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도덕과 윤리가 사람들의 관심 뒤로 밀려나고, 사회분위기가 수상해지더니, 이제는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는 위악적인 경구가 여과 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양보할 줄 모르고 이익만을 앞세우는 이기주의자를 사회가 앞장서서 칭송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쯤 되면 권선징악이라는 인류의 기본 가치관이 위험해지고 맙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 이유도 이런 이기심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아예 결혼을 기피하거나,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부부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로 낮아져 국가의 인구구조가 붕괴될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여성 스스로 모성을 포기하다가는 가족 해체라는 말이 곧 다가올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지금까지는 남성중심 사회의 가부장제적인 제도에 길들여진 여자들의 일방적인 '인내와 희생'이 우리 가정 윤리를 지켜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타인에게 손톱만큼도 손해보지 않고 치열하게 계산해서 확실하게 자기 이익을 얻어내는 사람을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자아 성취와 희생이 서로 모순된 개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자기의 발전이나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바람직해 보입니다. 또한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돕는 착한 사람들의 모습은 감동을 줍니다. 진실로 잘난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이 더 대접받아야 사회가 편안합니다. '신은 우리에게 선(善)을 알게 하기 위해 양심을 주었다'는 J.J 루소의 말을 되새겨봅니다.
박 명 희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