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최희암 감독이 선수들을 마구 때린다고 합니다. 모비스에 와서도 그러는지 궁금합니다. 얼굴만 봐서는 그럴 분이 아닌데. 답변: 혼만 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마 전 정훈에게 사랑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연대시절 고대와의 경기를 보러 갔는데 작전타임 때 서장훈을 발로 차더군요. 최감독 성격이 불 같다는 건 유명합니다. 경기를 잘못하면 바로 따귀 때리고 발로 찬다고 합니다. 모비스에 와서는 보통 선수들의 나이가 30에 가까우니 때릴 시기는 지났죠. 작전 소화력이 부족한 선수나 어린 선수에게는 혼내거나 1:1 면담을 하겠지만. 최감독은 1:1 면담을 좋아합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지난 2월 프로농구 시즌 중 울산 모비스를 이끄는 최희암(崔熙岩·48) 신임감독을 놓고 네티즌들이 가진 대화중의 하나이다.
최감독은 체벌이 많다는 지적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연습 중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불성실한 선수는 많이 혼내지요. 집중력은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코트와 관중석이 모두 흥분한 중요 경기에서 집중력이 부족하면 실수를 반복하고 팀웍을 깨뜨리게 돼 평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입니다." "체벌은 프로에서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프로라고 감독과 선수의 관계가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가 되는 것은 아니죠. 여전히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과 제자이니까 필요하면 체벌을 가합니다. 그렇지만 경기중 선수를 때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경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야단을 치거나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렇다. 무명선수 출신의 성공한 감독들이 대부분 그렇듯 연습때는 누구보다 혹독하지만 일단 경기에 들어가서는 선수가 실수를 해도 벤치에서 일어나 손뼉치며 격려하고 형처럼 다독이는 게 그이다.
화려했던 대학감독을 끝내고 제2의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프로무대가 만만할 리는 없다.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던 전년도 꼴찌팀을 6위에 올려놓은 것만도 성과라 할 수 있지만 '최희암'이라는 이름과 주위의 기대를 감안하면 본인의 말대로 첫 시즌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다.
4∼5년 계약을 하자는 구단의 제의를 마다하고 "프로답게 만족할 성적을 못 내면 떠나겠다"며 2년만 계약한 최희암감독. '대학때는 최고선수들을 갖고 있어 쉽게 성적을 냈지만 이제는 다를 것' '프로농구가 의무적으로 4개월간 단체훈련을 못하게 됐으니 아무리 독종감독이라도 별 수가 없을 것' 등등의 부정적 전망이 있지만 그의 끈질긴 농구인생을 아는 사람들은 1년후 나머지 절반도 성공으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농구선수 최희암'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휘문중 1학년때 키가 크다고 농구부에 들어갔으나 177㎝에서 더 이상 크지 않았다. 휘문고 졸업때는 뽑아주는 대학이 없어 연세대 체육교육과에 시험을 보고 입학해 농구를 계속했다. 물론 수비전문 선수였다. 현대 창단 멤버로 들어가서도 1년만에 밀려나다시피 해병대에 입대. 제대후 현대에 복귀했다가는 이라크 건설현장 근무를 자원했고, 1년만인 86년 모교의 부름을 받았다.
31세의 최연소 무명 대학감독. 하지만 그는 내리막 길을 걷던 팀을 3년만인 89년 대학농구 4관왕에 올려 놓았다. 중앙대의 6년 독주에 제동을 걸고 연세대의 시대를 연 것. 94년 3월에는 농구대잔치서 사상 첫 대학팀 우승의 신화를 엮어냈다. 당시 TV 농구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방영과 맞물려 연세대팀은 폭발적 인기를 누렸고 최희암감독은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등과 함께 오빠부대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3년후 또 96∼97 농구대잔치를 제패했다.
어린 대학선수들이 기아 삼성 현대등 기라성 같은 실업팀의 스타들을 꽁꽁 묶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최씨에 옥니, 곱슬머리로 독종의 3대 조건을 모두 갖춘 감독의 근성과 집념이었다. 그러나 채찍만으로 선수들을 움직일 수는 없는 것. 최감독은 외국서적과 NBA경기 비디오를 통해 선진기술을 끊임없이 습득해 실전에 응용하는 학구파이자 작전의 귀재이기도 했다. (최감독은 99년 미국연방체육대학원에서 '한국프로농구 관중의 만족도'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이론적 밑바탕은 이미 대학시절 이루어졌다. 동기생 신선우 박수교 장봉학과 1년후배 신동찬 박인규등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는 동안 학교에 남은 그는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대학 선수출신인 단 스미스 코치로부터 1년간 천금같은 기술들을 전수받았다. 프리징 플레이(freezing play) 페이크 스위치(fake switch) 트래핑 디펜스(trapping defense)등. 또 그가 국내 농구인중 가장 이론과 실제를 겸비했다며 존경하는 방열 감독(현 경원대교수)의 지도도 큰 도움이 됐다. 방열감독은 하나를 배우면 열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다. 정덕화(SBS) 유재학(인천 SK), 신선우(KCC)도 기아 또는 현대에서 방열감독에게 배워 성공한 현역 프로감독이다.
최희암감독은 연세대를 맡은 후 동계훈련을 가면 새벽 5시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속에 선수들을 산속 개울에 몰아넣는가 하면 20km구보를 거르지 않았다. 평소 선수가 다리가 아프다면 훈련시간 내내 팔굽 펴기와 윗몸 일으키기를, 팔이 아프다면 운동장 돌기를 시킬만큼 철저했다.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도 훈련을 통해 체력과 정신력을 충분히 배가 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고교시절 부상위험 때문에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못해 하체의 근력이 부족했던 서장훈은 강훈과 꾸지람을 못 이겨 농사를 짓겠다고 잠적하고, 우지원은 농구에 자신이 없다며 팀을 이탈하기도 했다.
93년 12월 대학연맹전에서 3위로 떨어진 후에는 감독을 따라 삭발한 선수들을 대낮 교내 백양로에서 오리걸음을 시키는 정신훈련을 실시한 후 농구대잔치 20연승으로 우승을 이루어냈다. 연세대 농구팀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선수 스카우트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스카우트는 거의 포지션별로 격년으로 뽑아 우수선수를 데려다 죽이는 경우는 없었다고 자부한다. 당시 선수들은 놀아도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에 '효율적 훈련'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포츠의 가치가 무엇이냐. 노력이 없는 결과는 가치가 없다. 특히 스타는 남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며 불호령을 내렸다.
최감독은 "선수들을 깨끗하고 순수하게 키우려 애썼다. 비신사적 플레이는 삼가고 경기에 지더라도 승복할 것을 강조했다. 프로에 가서 손가락질 받는 제자가 없고 조직에 잘 적응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또 '농구를 끝내고 사회에 나가서 남에게 속고 살지 않을 정도로는 공부해야 한다'며 자기계발 특히 대인관계와 언어구사 능력의 배양을 강조하고, 무조건 용돈의 10%는 문화생활에 쓰도록 했다고.
그의 제자들은 서장훈(4억3,100만원) 이상민(3억원) 문경은(2억7,000만원)이 지난 시즌 연봉순위에서 1,2,4위를 할 만큼 프로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하고 있다.
NBA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대학 최고스타 방성윤(3년)은 그의 마지막 제자이다.
프로행은 나태해지는 자신에 자극을 주기 위한 모험이기도 했다.
대학에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를 뽑아 썼는데 프로에서는 선수구성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수를 마음에 들게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적이 안 나면 기다려 주지 않는 게 프로이다. 대학에서는 상대팀에 아무리 좋은 선수가 있더라도 몇 년 후 졸업하면 역전시킬 수 있지만 프로는 다르다.
외국 용병 2명이 거의 승부를 결정하는 현상도 난감한 문제이다. 모비스를 맡은 후 13명중 10명을 바꾸었다. 기량보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한 선수들을 뽑았다. 우지원(30) 전형수(25) 김태진(29) 오성식(33) 정인교(34)등. 전 소속팀에서는 소위 팽 당한 선수들. 쓴 맛을 본 선수들이라 강한 의지가 있었다. 지난 시즌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선수들이 뭉친 결과라고 본다.
그러나 코트에서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모르는 선수도 많아 답답했다. 때로 기본을 가르치며 '백지가 쉬우냐, 남이 그려 놓은 그림을 고치는 게 쉬우냐' 고민해 본다. 프로선수는 굳은 완성품이라 고치는 게 어렵고, 그렇다고 신인을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끔 힘들 때 대학감독 시절이 그리워 지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련과 도전에 젊어지는 기분이 들어 만족감이 더 크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유석근 편집위원
■프 로 필
55년 전북 무주생
74년 연세대 체육교육과 입학
78년 현대농구단 창단멤버 입단
85년 현대건설 바그다드 근무
86년 연세대 농구감독 부임
88년 연세대 체육학 석사
93년 유니버시아드 감독
99년 미국연방체육대학원(USSA) 박사
2002년 울산모비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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