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배구의 유일한 아시안게임 우승(94년 히로시마)과 세계선수권 유일의 4강(94년 상파울루), 올림픽 6위(96년 애틀랜타). LG정유의 대통령배 9년 연속우승과 4년1개월간 국내대회 92연승. 일신여상의 대통령배 여고부 6년 연속우승과 118연승. 김철용(金哲鎔·49)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의 화려한 전과이다. "지도자는 키가 상관없으니까 얼마든지 우승할 수 있지요." 자신의 말대로 선수시절에는 176㎝라는 작은 키가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되었지만 지도자로서는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스타를 만들며 승리의 금자탑을 쌓은 승부사.90년대 한국배구를 이끌었던 컴퓨터 세터 이도희, 170㎝의 단신으로 대포알 같은 파워를 자랑하던 장윤희, 187㎝의 최장신 센터 홍지연, 송곳 같은 속공을 내리꽂던 박수정, 깔끔한 왼쪽 공격수 정선혜… . 한때는 국가대표 주전 6명중 5명이 그의 선수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김감독의 LG정유가 미도파-현대의 양강시대를 무너뜨리고 독주한 9년간 팬들은 싱거워진 여자 배구판을 서서히 외면하고, 10개에 이르던 실업팀이 5개로 줄어들었으니 여자배구 쇠퇴의 주범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비결은 무엇인가. 무명선수 시절의 설움과 오기, 공수부대 훈련을 통해 밴 근성, 노력한 만큼 얻는다는 믿음과 자신감, 독실한 신앙이 어우러져 형성된 특유의 지도력이다.
그의 선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전북 군산북중 2학년때 배구를 시작, 서울의 남산공전에서 7개월 만에 허리를 다쳐 쉬다가 부산의 배구명문 성지공고로 옮겼다. 그러나 뛸 자리가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키가 조금도 자라지 않은 데다 1년 선배 강만수(전 현대자동차 감독), 동기 신치용(삼성화재 감독), 2년 후배 강두태 (전 국가대표) 엄한주(대한배구협회 전무이사) 등 주위에는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
군대도 배구선수로 가지 못하고 일반병으로 입대, 공수부대에 차출되었다. 대학 4년때 학도호국단 간부로서 멋모르고 들어가 열흘간 받은 훈련이 악몽 같은데 1년만에 군인이 돼 똑 같은 장소에서 더욱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된 것. 실로 인간을 개조하는 끔찍한 훈련이었지만 인내와 함께 교육의 중요성을 배운 소중한 기회였다.
지도자로 첫 발을 내 디딘 곳은 경기 성남시의 성도고(현 송림고). 여기서 공수부대의 근성을 그대로 쏟아 부었고 1년만에 추계연맹전 우승을 일궈냈다. 82년 63연승을 달리던 일신여상을 맡아서는 연승기록을 118까지 늘렸다.
당연히 실업팀의 손길이 뻗쳐 4∼5위팀인 LG정유(당시 호남정유)로 옮겼다. 훈련은 새벽 오전 오후 야간으로 하루 4차례 실시되었다. 정상정복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낙오하는 선수도 없었다. 결국 3년만에 대통령배 정상에 오르고 무적의 연승행진을 계속해 9연패까지 기록했다. 하지만 매년 당연시 되는 우승에 회사의 관심이 떨어지고, 신인 확보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으면서 팀은 지난 봄 대통령배 최하위에 떨어졌고 김감독은 사표를 제출했다.
대표팀 사령탑에 복귀한 것은 지난달. 이제는 대표팀에 자신의 선수가 한 명도 없어도 감독 자리가 주어질 정도이다. 그러나 처음 대표감독에 오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한배구협회는 대통령배를 2년 연속 우승해도 "경험이 적다" "특정 종교에 너무 집착한다"며 기피하다가 결국 대안이 없자 94년 2월 대통령배 3연패를 앞둔 그에게 여자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다.
김감독은 두달만에 맞은 세계 그랑프리대회서 80년대 이후 한 세트를 뺏는 것이 목표였던 중국을 두 번이나 꺾으며 4위에 오르고, 10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연속 3-2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형 속공 플레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고 이도희는 최고 작품이다. 공격수였던 이도희는 일신여상 1학년때 김감독에 의해 세터로 변신했다. 속공에 맞추는 토스와 감각이 감독의 눈길을 잡아 끌었다. LG정유에 들어가서는 2∼3년 후 은퇴의 기로에 섰다가 김감독이 오면서 세계 정상급의 세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이도희가 구사하는 빠른 토스는 김철용 감독 아래서 훈련받은 부지런한 공격수만이 제대로 받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170㎝의 단신 장윤희가 세계적인 공격수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블로커가 따라 붙을 틈을 주지 않고 네트 바로 위에 빠르게, 낮게 볼을 띄우는 이도희의 토스가 결정적 도움이 됐다. 김감독은 최선을 다한 후 모든 것을 하느님에 맡긴다. LG정유의 고위층은 경기 후 인터뷰 때마다 그가 '하느님…' 운운하는 것을 가장 곤혹스러워 했다.
전국민을 고객으로 하는 회사의 이미지를 생각해 공적인 자리에서만은 신앙에 관한 언급을 자제해 달라고 조심스럽게 당부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선수들도 그를 따라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신앙을 통한 일체감은 큰 힘이 되었다.
그가 선수들을 10년씩 끌고 나갈 수 있었던 무기는 신뢰였다. 선수들에게 확실한 동기를 부여하고 이를 지켰다. 대학진학이 그 중 하나. 92년 이도희를 시작으로 홍지연 오윤경 김귀현 박수정 등이 회사의 지원으로 한체대 야간 대학에 진학해 운동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이도희는 대학원까지 마치고 현재 장안대 강의와 TV의 비치발리볼 해설을 맡고 있다.
장윤희와 함께 입단했던 김호정은 일본 도카이대학에 유학, 배구와 학업을 병행한 후 현지서 고교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유석근 편집위원
■약력
1954년 전북 옥구생
74년 부산 성지공고 졸
78년 성균관대 체육교육과 졸
78∼80년 공수부대 복무
80∼82년 성도고 감독
82년∼87년 일신여상 감독
87년 일신여상 118연승 기록
87∼2003년 3월 LG정유 감독
91∼99년 대통령배 우승
93년 3월 여자대표팀 감독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우승
94년 세계선수권 4위
96년 올림픽 6위
2000년 올림픽 8위
■이도희선수가 본 金감독
고교시절부터 14년을 함께 생활하면서 한결 같이 느낀 것은 감독님의 승부에 대한 욕심이다. 약한 팀과 경기할 때는 2진을 기용해도 될 텐데 15-0이 나더라도 악착같이 싸우도록 해 '꼭 저래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항상 최선을 다 하고 상대의 기를 꺾어 놓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지고는 못 배기는 감독님은 은퇴하고 결혼한 나와 장윤희를 다시 불러다 훈련시켜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는가.
김감독님이 LG정유에 처음 오셨을 때 팀에는 B급 선수만 있었다. 국가대표는 물론 스스로 배구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선수가 하나도 없었다. 키도 홍지연을 빼고는 모두 단신이었다.
때문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정신력과 연습밖에 없었고 선수들은 고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통령배 첫 우승을 차지하기 전 해인 91년에는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초인적이라고 할 정도로 지독한 훈련을 했다. 여름 휴가를 가야 할 때 감독님은 휴가대신 숙소에 남아 모두 운전면허를 따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새벽에 운전연습을 하고 돌아 오면 '놀면 뭐하냐'며 다시 훈련을 하도록 유도했다.
힘이 들거나 감독님이 야속해도 울 수가 없었다. 누구든 울면 밥을 먹다가도 다시 나가 훈련을 한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 하다가 기진맥진해 토하고 돌아 올 정도로 힘이 들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동료들의 기량이 하루하루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대표선수가 되어서 고된 생활에 불평을 했다가는 "저 철없는 것들이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어. 태극마크를 못 달아 본 사람의 한이 어떤 것 인줄 알아"하는 질책을 들어야 했다. 감독님 앞에 서면 태극 유니폼은 벗을 수 없는 멍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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