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가 한국사회에 남겨놓은 유산은 많겠지만 문화면에서는 다양한 민중가요의 분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통해 대학생들만의 전유물이던 서정적인 민중가요가 일반인들에게로 펴져나갔고 80년대 후반 들어 노동운동이 확산되면서 노동조합에 몸담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노동가요 한 두 곡쯤은 자신있게 따라부를 수 있게 됐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직도 이 노래가 현장의 노래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추억의 노래이다. 그럼 이런 추억의 노래들을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을까?그러긴 힘들다. 노래방의 선곡이 상업적인 대중가요 중심으로 흐르고 있어서 민중가요가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기술은 진보해서 더 많은 노래를 기기에 집어넣을 수 있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긴 더욱 힘들어지는데…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창작 가요의 수입원 가운데 최고 효자는 노래방이다.
노래 한 곡을 만들어 창작자가 받는 음악저작권은 크게 공연사용료와 방송사용료, 복제·전송사용료 등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노래방 유흥주점 단란주점에서 불리는데 따라 비용을 지불하는 공연사용료가 184억여원으로 전체 저작권 수익 391억여원 가운데 47%를 차지한다.(2002년 통계) 반면 방송사용료는 유무선을 통틀어도 87억여원(22%)에 불과하다. 또한 노래방 기기에 음악을 집어넣으면서 생기는 복제저작권료도 15억여원(3.9%)이나 된다. 공연장 열기도 시들하고, 음반 판매도 불황이라는 음악시장의 현실을 염두에 둘 때 가장 큰 시장은 노래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업계에 따르면 전국의 노래방 업소는 3만개 정도. 노래방 업소마다 7∼10개 정도의 노래방 기기를 설치하고 있는 걸 감안하면 전국에 보급된 노래방 기기는 얼추 잡아봐도 21만개에서 30만개. 매일 밤 이들 기기에서 불려지는 곡 수를 가늠해볼 수 있다.
노래방 기기에 오르는 노래 선곡은 철저하게 노래방 기기 제작업체 소관이다. 노래방 기기 제작업체는 자체 음향연구소나 콘텐츠기획팀을 두고 노래방에 오를 노래를 선택한다.
노래방 기기 업계에서는 국내 창작 가요를 4만곡 정도로 보고 있다. 노래방 기기에 들어간 노래는 최대 2만곡 정도인데 이 가운데 1만곡 정도가 국내 가요다. 물론 다달이 업체마다 100여곡 정도를 새로 넣고는 있지만 쏟아지는 신곡 가운데 절반 정도. 이나마도 지난해 들어서야 가능해졌다. 보통 업계에서는 다달이 새음반이 20∼30장 사이로 출반되어 적어도 200곡 이상의 신곡이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이미 들어갈 시기를 놓친 민중가요가 설 자리는 더욱 없다.
민중가요가 설 자리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노래방의 선곡 기준 자체가 상업가요 가운데서도 인기있는 것을 추리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국내 노래방 기기 업체 가운데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금영미디어 음향연구소 김성수(43) 부장은 "공중파 TV 4개사의 가요순위 프로그램과 케이블 TV 인기도, 음반 판매량, 음반 발매후 팬클럽 반향, 스포츠 신문의 소개기사, 각종 가요인기조사, 인터넷사이트의 접속이나 다운로드 횟수를 토대로 노래방 기기에 들어갈 노래를 정한다"고 밝혔다. 요즘 방송들이 젊은 층들의 기호에 맞는 노래 중심으로 운용된다는 점을 감안해서 이 회사 사이트를 통해 신청곡을 직접 받기도 하지만 "그렇게 선정된 노래는 인기가 별로 없어서 역시 객관적인 자료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불려지긴 해도 확실한 음원이 없으면 역시 노래방 음악으로 선택되기 힘들다. 노래방 기기에서 교과서에 수록된 노래와 인기 구전가요가 별로 없는 것도 이때문이다. 노래방 기기 업체들은 일단 CD에 수록된 곡 가운데 인기곡을 선정해서 음원을 카피한 후 그것을 전자음향(MIDI)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가요 가운데서도 김민기 양희은 안치환 김광석 등을 통해 CD로 출반된 노래들은 노래방에서 찾기 쉬운 반면 현장에서는 더 많이 불려지면서도 대중가요처럼 상업적으로 팔리는 음반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노래들은 노래방에서 찾기 힘들다. 민주노총 문화국에 따르면 노동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는 고전들은 '철의 노동자' '단결투쟁가' '파업가' '동지' '또다시 앞으로' '연대투쟁가' '님을 위한 행진곡' 등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노래방에서는 부를 수 없다.
노래방 기기가 인터넷과 결합하는 형태로 나아가면서 실상 현재의 노래방 기술수준은 넣고 싶은 노래는 다 넣을 수 있는 정도. 그러나 전자음향으로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곡당 100만원 정도)과 복제할 때마다 내야 하는 저작권료를 감안해서 아무 노래나 넣을 수 없는 것이 업체의 고민이다. 일단 수록되면 저작권료를 비싸게 내야 하는 한국만의 실정도 선곡을 까다롭게 만든다.
또한 '민중가요가 갈 길은 상업적인 노래들이 갈 길과는 다르다'는 민중가요 작곡자들의 '선민의식'이 노래방 기기의 편식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기도 하다. 민노총 박선봉 문화국장은 "단위 노동조합에서 노래방용 전자음향으로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있었고 민중가요 노래패 안에서 전송용 음악으로 만들어 수익을 올리자는 제안도 검토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상업성이 그다지 없다고 생각해서 지금은 모두 포기했으며 노동가요의 유통경로는 상업가요쪽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며 노래방에 참여하는 것에 시큰둥해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역시 "우리 사회에 다양한 음악을 흐르게 해야 한다"는 의견(최병선·인터뷰 기사 참조)과 "노찾사의 순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메아리 출신 노찾사 전 대표 한동헌)이 엇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가 강해지려면 다양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술이 진보하면서도 노래 경향만은 방송과 스포츠 신문, 음반판매라는 상업성의 잣대가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금의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중간에서 만날 수는 없는 것일까.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태진미디어가 지난해 12월 인터넷과 연결된 노래방 기기인 '질러넷'을 보급하면서 노래방에서 불리는 노래를 자동으로 집계할 수 있게 됐다. 금영미디어도 올해내로 이와 유사한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노래방 기기(21만∼30만대) 가운데 '질러넷'은 불과 3,500여대이므로 1.2% 정도. 보급지역도 서울 경기 인천의 신세대들이 즐겨찾는 중심가에 집중되어 있다. 6개월여치 누계에는 '고전'가요가 많은 반면 최근 통계에는 신곡이 많다.
■"노찾사" 2대대표 최병선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2대 대표인 최병선(44·사진)씨는 민중가요가 대중적인 판로를 무조건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음악의 다양화를 위해서도 대중화의 길을 적극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87년 대학노래패 중심으로 결성된 노찾사는 89년 이래 총 6장의 음반을 내고 서정적 민중가요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원광대 무역학과 출신의 최씨는 지난해 음반라이센스 업체인 저스트 미디어주식회사를 창립, 중남미의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노찾사 노래 가운데 노래방에서 불리는 곡이 있나.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사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그날이 오면' 다섯곡이 있다. 노찾사의 노래가 전부 60곡쯤 되는데 모두 89년 나온 2집음반에 실렸던 곡들이다. 당시에는 노찾사가 대중적인 인기도 끌어서 노래방에까지 갈 수 있었다."
―노래방에 가는 것은 민중가요의 수치쯤으로 여기는 견해도 있던데.
"좋은 노래라면 오히려 많이 불려야 하는 것 아닌가. 90년대 중반 들어 우리 사회가 이분화하면서 현장 중심 노래를 부르기도 손들어주기도 멋적은 시대가 됐다. 또 기존 유통망이 이런 노래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안으로 노조 중심의 유통망을 갖게 된 것이다. 이걸 무시하고 싶지 않지만 대중적인 유통망도 가져야 우리끼리만의 문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음악적으로 풍성해질 것이다. 전체 음악시장에 기여하는 바도 클 것이다."
―그를 위해 노찾사가 할 일이 있는가.
"다시 활동해야 한다. 과거의 명성과 특성에 매달리지 않고 포크의 정신을 살리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2년전부터 40대를 중심으로 포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거기에 맞춰서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는 노래들을 노찾사가 해보고 싶다. 내년이 창립 20주년인데 후배들한테 자료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회원 30명 정도가 활동 재개를 논의중이다."
/사진 최흥수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