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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실미도 당시 소대장 김이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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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실미도 당시 소대장 김이태씨

입력
2004.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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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전우회'(정식 명칭은 '공군 실미도 생존자 전우회'다)에서 연락을 받았다. 부대 창설 때부터 참여, 실미도의 '진짜' 산 증인이라고 할 만한 이가 따로 있다고 했다. 냉혹한 군인이면서도 사실은 인간적인 내면을 가진 영화 속 '조 중사'(허준호 분)의 캐릭터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도 했다. 실미도에서 3년간 소대장을 맡아 훈련병들을 교육했던 김이태(金利泰·60·당시 중사)씨였다.고향(경북 의성군 안계면)에서 만년을 지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환갑의 나이에도 그의 몸은 차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간혹 번득이는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군인(그것도 특수부대원 같은)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자조하지도 않았다. 그냥 담담하게 옛일을 회상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가 온몸으로 겪어낸, 전혀 극화(劇化)되지 않은 실미도의 생생한 이야기다.

김이태씨는 36년 전의 그날을 선연하게 기억한다. 20명쯤 되는 이른바 '684부대' 제1진으로 실미도에 첫발을 디딘 1968년 4월4일. 칠흑 같은 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 인천부두를 출항한 배는 한시간여 만에 낯선 해안에 멎었다. 동이 트면서 모습을 드러낸 능선 여기저기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런데도 섬은 왠지 음산해 보였다.

4년 전 공군 하사관 27기로 임관한 김씨는 대북 비밀정보·첩보임무를 수행하던 공군 2325전대 소속으로 온갖 특수전 과정을 거친 베테랑 요원이었다. 며칠 전 부대의 김모 소령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나와 같이 일해보자. 특수공작을 해볼 생각이다." '평양에 침투, 주석궁을 폭파하고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한 작전'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실미도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황량한 섬에 40인용 텐트 하나만 설치해놓고 부대 창설준비에 들어갔다. 바위를 TNT로 폭파해 충분한 식수원을 찾아냈을 때 언뜻 '전조(前兆)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정반대의 결과가 빚어지기는 했지만. 몇 주 뒤 훈련병들이 들어왔다. 무장한 교관과 기간병들이 해안에 도열, 배에서 뛰어내리는 31명을 맞았다. 사회에서 문제가 있던 애들(사실은 30대 중반들도 있었다. 교관이나 기간병들은 대개 그보다 어린 20대 초·중반이었다)이라는 얘긴 들었지만 과연 외양들이 만만치 않았다. 머리를 밀어 유난히 험악해 보이는 한명이 경례도 안하고 지나치길래 권총을 뽑아 발치 앞으로 쏘았다. 첫날부터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섬을 휘감았다.

곡괭이와 야전삽 만으로 야산을 깎아 연병장을 만들고 막사를 지어 시설을 대강 갖추고 나서 정식 입소식을 치렀다. 10명씩으로 3개 소대가 구성됐다. 김씨(하사였지만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는 B소대장을 맡았다. 부여된 시간은 단 3개월이었다. 악과 '곤조' 뿐 기본적인 규율도 전투능력도 없는 집단을 단기간에 '살인병기'로 탈바꿈시키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고려치 않는 가혹한 훈련 뿐이었다.

목표는 무조건 '김신조 부대(그 해 1월21일 청와대 습격을 기도했던)보다 한단계 더'였다. 그들이 몇 분만에 몇㎞를 산악구보했다고 하면 1∼2분이라도 단축해야 하는 식이었다. 구보, 행군, 유격훈련 때마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가차없이 캘리버30 기관총이 훈련병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실제로 뒤쳐진 H가 총탄에 옆구리를 관통 당했다. 40여m 외줄타기 도강훈련 과정에서는 K, L 두 명이 10여m 아래로 추락했다. 내무반, 화장실 앞에 철봉을 세워 드나들 때마다 무조건 매달리도록 했다.

강철 같은 체력을 키우는 외에 침투, 사격, 격투, 살상 등의 전투기술도 고도로 숙달시켰다. 30m이상 떨어져 출몰하는 이동표적을 뛰며 쏘아 맞추고, 전광석화 같이 대검을 던져 6m쯤 떨어진 과녁을 정확히 꿰뚫는 것쯤은 기본이었다. 권투와 합기도를 가르치고 서로 치고받게 하는 방식으로 실전능력을 키웠다. 김포와 여의도 등지에서 숱하게 낙하훈련도 실시했고, 물에 던져져도 서너 시간은 견디도록 만들었다. 침투방법을 논의 끝에 기구(氣球)에도 착안했다. 지금에야 레저로도 하지만 당시로선 기발한 수단이었다. 김씨 자신도 포항까지 날아가는 훈련을 함께 하다 가스(위험한 수소가스를 썼다)가 새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실미도에서 인정(人情)은 주어서도, 기대해서도 안될 것이었다. 작전에선 한명의 낙오가 곧 몰살이니까. 아무리 해도 진전이 더딘 C가 있었다. 전체를 위해 제거하는게 낫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저녁 때 해안으로 끌고 나가 물 속에 집어넣고 밟았다. 10분이 지났는데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다시 백사장에 묻었다. "내일 아침 점호 때까지 죽지 않았으면 살려줘라." C는 그렇게 살아났다. 그래 봐야 3년쯤 목숨을 연장한 것에 불과했지만.

작전지역이 북한이었으므로 개인화기는 모두 당시 북한에서 쓰는 것들로 제공됐다. 제식훈련도 북한식으로 이뤄졌다. "평보로 가!" "정보(다리를 90도로 들어올리는)로 가!"하는 식이었다. 틀리면 미군 야전침대목을 뽑아 만든 몽둥이가 사정없이 머리로 날아갔다. 워낙 단단한 목질이어서 맞으면 그대로 피를 뿜으며 거꾸러졌다. 군가도 "장백산 줄기 줄기…"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적기가(赤旗歌·영화에 나오는 "비겁한 자들아 갈테면 가라/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하는 가사의 그 노래다)를 부르도록 했다.

훈련병 한명이 사회에서 걸린 지독한 성병이 통 낫지를 않았다. 누군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면 된다"고 했다. 야산의 오래 된 무덤을 파헤쳐 노란 물이 고인 유골을 찾아냈다. (중국 산동성 사람의 묘였다) 아무도 먹으려 들지않아 김씨가 역한 비위를 참아가며 시범을 보였다. 남은 해골을 내무반 앞에 내다 걸었다. 그게 부대표지가 됐다. 어쨌든 그 훈련병은 성병이 나았다.

예정된 기간이 지났을 때 김씨를 포함한 지휘부는 "이만하면 됐다"는 평가를 내렸다. 작전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전진기지로 삼은 백령도로 가 대기했다. 그러나 끝내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한달여만에 귀대했다. 이 때부터 지루한 유지훈련이 반복됐다. 그래도 한동안은 불시 출동명령에 대비하느라 긴장감이 팽팽했으나 1년여를 넘기면서 확연히 분위기가 바뀌어갔다. (69년10월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어 남북화해가 시도되면서부터다) 쌀밥에 소고기, 닭고기 등으로 풍성하던 식사(너무 많이 먹어 소화제를 복용할 정도였다)가 보리밥에 단무지로, 아리랑 파고다담배도 화랑으로 바뀌었다. 전에 없던 사고가 잇따랐다. 강간사건도 그 중 하나였다.

밤에 내무반에서 교육용 영화 '전투'(인기 TV시리즈물이었던 빅 모로 주연의 그 영화다. 김희갑·황정순의 '팔도강산'과 함께 단골 상영작이었다)를 보고 있을 때 K 등 셋이 화장실에 간다며 줄줄이 밖으로 나갔다. 밤 점호 때 B조 조장이 "애들 셋이 없어졌다"고 다급하게 보고했다. '아차' 싶었다. 마을이 있는 인근 무의도는 간조 때면 걸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 통신을 시도했다. "바보 같은 놈아! 침투훈련 받은 놈들이 전화선을 그대로 두었겠느냐." 전 부대원을 이끌고 무의도로 건너가는 데 총성이 울렸다. 국민학교 쪽이었다. 예비군, 경찰, 교직원들 얼굴이 공포에 질려있었다. 숙직실 안에 주민 20여명이 잡혀있다고 했다. "나 소대장이다. 없던 일로 약속하겠다. 민간인들은 풀어줘라." 악에 받친 대답이 돌아왔다. "개소리 말아!" 부대원에게 막소주 한사발씩 돌리고는 일제히 총을 난사하면서 숙직실에 뛰어들었다. 이미 둘은 대검에 목과 배를 찔려 내장이 쏟아져나온 채 숨져있었다. K도 목을 찔렸으나 숨은 붙어 있었다. 그가 둘을 죽인 뒤 자살을 기도한 것이었다. 다행히 인질들의 희생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섬 주민에게서 처녀 자매 둘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아이들도 있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간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즉시 실미도로 돌아왔다. 내무반 침상에 묶인 상태에서 등 뒤 유리창을 깨 목을 긁으며 난동을 피우는 K의 머리를 향해 차갑게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하루는 인천의 209파견대를 다녀오는데 부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추궁 끝에 포악한 성격의 A조 조장 Y가 동료 훈련병들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자행해온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그가 '감히' 기간병을 구타한 일이 발생했다. 전원 연병장에 집합시켰으나 상황을 눈치챈 Y만 나오지 않았다.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다"는 훈련병들에게 로프를 던져주었다. 몽둥이를 꼬나 쥔 훈련병들이 내무반으로 난입했다. "악! 깨지는구나"하는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차별로 난타 당해 만신창이가 된 Y에게 물을 끼얹어 정신을 들게한 뒤 해변에 던졌다. "잘 가라." Y는 이튿날 아침 숨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성욕구 해결이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훈련병들을 인천의 사창가인 속칭 '옐로하우스"로 데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좌절감이 깊어지는 훈련병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부대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워졌다. 생각 끝에 상부에 건의했다. "이대로 두면 반드시 큰일이 벌어집니다. 차라리 애들을 공군 하사관으로 임관시켜 주십시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후의 방책을 냈다. "어차피 사회에 복귀시킬 생각이 없다면… 그럼 전부 죽여버립시다. 훈련한다며 덕적도 옆 무인도에 상륙시킨 뒤 캘리버50(중기관총)으로 쓸어버리면 됩니다. 못 하겠다면 내가 하겠습니다." 역시 아무 응답없이 불안한 세월만 흘렀다.

일요일이면 섬 한귀퉁이에 혼자 서서 하루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일이 잦아졌다. 생각할수록 훈련병들의 운명이 불쌍하고 비참했다. 강간사건, 훈련 중 사고, 즉결처분 등으로 이미 훈련병 일곱의 목숨이 사라진 터였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지만 세월이 만든 미운정 고운정은 어쩔 수 없었다. '저들도 가족이 있을텐데….' 백령도에서 출동명령을 기다릴 때 '이제 저 놈들과도 마지막이구나'하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던 일도, 앞날을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못 믿겠으면 나를 쏘라"며 소련제 떼떼(TT)권총을 내던져주는 모험으로 분위기를 수습했던 일도 떠올랐다.

중사로 진급해있던 김씨는 그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71년 봄 본부복귀 명령을 받았다. 실미도에 발을 디딘지 꼭 3년 만이었다. 뱃전에서 멀어져 가는 섬을 바라보노라니 회한이 밀려들었다. '여기서 보낸 세월을 내 인생에서 파내어버렸으면….' 그리고 얼마 안돼 8월23일을 맞았다. 김포에서 정기 점프훈련을 위해 낙하복 차림으로 수송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훈련취소 명령이 하달됐다. "인천 송도쪽으로 무장공비들이 들어오고 있답니다." 뭔가 휙 머리를 스쳐갔다. "확인해 봐! 베레모에 위장복 차림인지." 잠시 후 "그렇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상부에 "우리 '오소리'(실미도부대 작전명) 애들"이라고 알렸다. UH-1H 헬기들이 상공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대방동 공군본부에 달려들어갔다가 인근 항공의학연구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류탄 폭사 현장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살아남은 훈련병 넷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튿날에는 다시 실미도에 들어갔다. 상황은 처참했다. 해변에서 발견된 기간병 시신의 총상 부위에는 벌써 바다생물이 잔뜩 기어붙었다. 내무반 침상 밑에서 쪼그려 앉아 죽은 기간병을 끌어냈고, 해변 동굴 속에서 가슴을 난사당한 채 눈뜨고 숨져있던 김모 하사도 찾아냈다. 섬 여기저기에서 아직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개가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게 실미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이태씨는 이듬해 군복을 벗었다. 결혼을 한 뒤 73년 준사관 시험에 응시, 다시 군인(준위)으로 보안사에 근무하다 79년 전역했다. 서울에서 무역업을 하다 고향에 내려가 농업기반공사에서 16년을 일하고 2001년 퇴직했다. 이장을 맡아 마을의 대소사를 챙기며 조용히 지내는 그에게 영화 '실미도'가 묻어두었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영화를 보며 많이 울었지요. … 그 땐 명령을 수행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악랄하게 대했던 것도 걔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지요. 평양 한복판에서 살아 돌아오게 하려면…. 지금 군인으로서 똑같은 명령을 받는다 해도 역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김씨의 눈자위가 젖었다. "다들 힘든 인생사를 겪는다고들 하지만 저만한 경우야 있겠습니까. 거기서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이 다음 지옥에 가거든 다 찾아 만나야지요.…" 위령탑을 세워 넋이나마 위로해주는게 마지막 바람이라고 했다.

긴 고백을 마치고 짙어진 어둠 속으로 돌아서는 뒷모습이 후련한 듯, 그러나 한편으론 쓸쓸해보였다. 우리 모두가 한때는 그랬듯 그 또한 광기(狂氣)의 역사에 치인 똑 같은 희생자였으므로.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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