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 직속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는 2002년 2월부터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하 동북공정)'이란 국가 프로젝트를 5년 간 추진해 오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 지리, 민족문제 등과 관련한 여러 문제를 학제적으로 다루는 국가 중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동북공정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과 발해 등의 한국고대사를 왜곡하고 있다. 현안인 중국의 고구려사 자국 편입을 위한 논리가 바로 이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체계적으로 마련되고 있다.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의 지방정권?
2001년 한국 국회에서 재중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특별법이 상정되자 중국 당국은 조선족 문제와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된 문제 등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2001년 북한이 고구려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신청하자 국가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서둔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명분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방해하고, 2003년 봄 오히려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주변의 고구려 고분군 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줄 것을 신청한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남북통일 후의 국경 문제를 비롯한 영토 문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도 볼 수 있다.
동북공정에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및 발해에 걸쳐있지만 가장 힘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는 역시 고구려사이다. 고구려는 전문 주제로 독립해 다뤄지고 있다. 국내 학자들이 특히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런 연구를 통해 중국이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일개 지방민족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동안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었으나 동북공정을 통해 중국은 고구려에 대한 공식 견해를 수립했고, 그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은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로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가 중국 영역 내의 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이라는 것, 몇 번의 천도를 통해 활동의 중심을 옮겼으나 결코 한사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고구려가 줄곧 중국 역대 중앙 왕조와 군신 관계를 유지했고 중국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그 관계를 스스로 끊지 않았다는 것, 고구려 멸망 후에 그 주체 집단이 한족과 융합했다는 것 등을 내세워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지방민족정권으로 보아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구려와 고려 및 조선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편다. 고구려의 고씨와 고려의 왕씨는 혈연적으로 다르며 시간적으로 250년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역사 계승의 성격을 띨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 기초해 볼 때 하나같이 수긍하기 어려운 궁색한 이야기들이다.
남북 공조와 독립연구기구 절실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역사왜곡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보다 더욱 심각하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건은 검인정 교과서 중 하나인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문제였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왜곡은 중국의 정부기관이 앞장 서서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더욱이 고구려사 뿐만 아니라 발해사와 고조선사까지 왜곡하고 있어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2,000년에 지나지 않게 되며 공간적으로는 한강 이남에 국한되는 결과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중국의 역사왜곡 논리와 근거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사실이 왜곡된 부분을 밝혀내고 치밀한 대응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왜곡에 장기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대한 역사와 지리 및 민족 문제 관련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여태까지 우리는 만주지역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연구 역시 일천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동북공정이 시작된 직접적 계기이자 우리에게 닥친 현안은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록 문제다. 다행히 세계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동시 등재하도록 권고했다.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는 것은 자칫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 역사인 것처럼 세계가 오해하도록 만들 수 있다. 고구려의 역사는 남과 북 어느 하나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이므로 남북 공조로 고구려의 역사를 지켜낸다면 남북 공조의 모범적 사례가 될 것이다.
우리도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 상응하는 연구기관을 설립해 중장기적으로 대응하는 방안, 특히 고구려사를 비롯한 고대 동북아 역사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국민과 세계에 홍보하는 학·민·관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고구려사연구센터를 설립해 이를 중심으로 관련자료 수집, 중장기적 기초 연구, 학문 후속세대 양성, 민간 전문기관 육성, 중국의 역사왜곡 실태 홍보 등을 추진해야 한다.
고구려사연구센터는 고구려사 뿐만 아니라 고조선사와 부여사 및 발해사를 포함하는 한반도 북방지역의 역사를 연구하고, 한반도 북방지역의 영토문제와 민족문제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해야 한다. 다양한 기능과 임무를 복합적으로 수행해야 하므로 정부나 민간 가운데 특정 부문이 주도하는 것보다는 정부와 학계가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시민단체가 측면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구센터는 유관기관(정부, 학계, 시민단체) 등과 공동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학·민·관 네트워크의 구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기관에 억지로 끼워 넣어서는 그 역동성과 효율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독립기관으로 새로 설립해 여러 기능과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제 맛을 낼 수 있다.
/최광식 고려대 교수·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
● 동북공정 누가 이끄나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변경역사영토연구소) 인터넷 사이트(www.chinaborderland.com)에는 고구려를 댜오위다오(釣魚島), 난사(南沙)군도 등 주요 영토 분쟁 지역과 함께 핵심 연구과제로 정해 놓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 가장 주도적으로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를 주장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 마다쩡(馬大正·사진)이다.
그는 변강사지연구중심의 전문가(학술)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 중국사회과학원 내에서 고구려사 학술 연구의 중심 학자로 볼 수 있다.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산둥(山東)대 역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올해 66세의 馬 위원장은 중국사학회 이사, 중국 중앙아시아 문화연구회 이사장 등 모두 예닐곱 개 정부 연구조직과 학회에 관여하고 있다. 중국인민공안대와 동북사범대 동북 민족·영토 연구소 겸임 교수로 있으며 중국 변경 문제 연구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馬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공저로 낸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에서 1970년대 국내 재야사학자들의 주장과 군사정권기 대북 팽창 역사관 등을 들어 한국의 고구려 연구를 비학술적이라고 비난했다. 이밖에 변강사지연구중심 주임(연구소장)과 전문가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리성( 聲·55), 신진 학자 리다룽(李大龍·40)도 고구려사를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이 큰 틀에서 동북공정을 지도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기관이라면 실질적으로 연구 성과를 내는 곳은 동북 지역, 특히 지린(吉林)성과 랴오닝(遼寧)성 학자들이다. 1980년대 초반부터 이른바 중국의 다민족통일국가론을 제창하며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고 주장해 온 쑨찐지(孫進己·73)가 대표적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1991년 랴오닝성 선양(瀋陽)시에 사립으로 심양동아연구중심을 세워 주임을 맡아오면서 동북지역 역사는 물론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여러 차례 그를 만난 서길수 고구려연구회장에 따르면 孫씨는 오랜 기간의 연구 성과로 논리 전개가 상당히 정치하며, 고구려사의 중국 귀속을 매우 당당하게 주장한다. 2002년 12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주최 학술대회 등 한국의 고구려 관련 학술대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해서 중국의 고구려 연구 동향 등에 대해 발표했다. 최근 젊은 중국 학자들의 고구려사 연구가 정밀하지 않다고 비판해 다소 따돌림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이 집중해 있는 지린성 지안에서 오랫동안 고분을 발굴하며 탄탄한 현장 경험을 쌓은 학자는 60세 전후의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대 고구려연구소 부소장이다. 동북지역 최고의 고구려 학자로 평가받는 耿 부소장은 지안박물관 직원으로 출발, 94년까지 부관장을 지내며 이 지역의 고구려 유적 발굴을 주도했다. '호태왕비 신고' 등 그가 써낸 논문도 대개가 현장 발굴 성과와 연구에 기초한 것이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고구려 재조명이 활발했을 때 도움을 주었다는 의심을 받아 박물관 부관장직에서 쫓겨나고 공산당 당직도 박탈됐지만 95년 중국에서 고구려 연구붐이 일면서 생긴 퉁화사범대 고구려연구소 부소장을 맡아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내며 복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耿 부소장 역시 국내 학술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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